지난 13년 동안 암약해온 북한 여간첩 김미화(36)가 공안당국에 적발됐다. 인터넷 채팅으로 알게 된 공기업 간부와 여행사 직원 등으로부터 기밀문건을 받아내 북한에 보고한 혐의다. 이 기밀문건 중에는 서울지하철 내부 관련 사항이 포함돼 있어 ‘지하철 테러’에 그대로 사용될 수 있다는데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뿐만 아니다. 김씨는 북 공작원을 데려오기 위해 전세기를 띄울 방안까지 모색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김씨의 계획대로 실현됐다면 서울 도심은 충격과 혼란으로 마비가 됐을 수 있었던 상황인 셈. 이에 따라 공안당국은 김씨의 남은 여죄를 밝히는데 주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를 두고 일각에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선거를 앞두고 여간첩 적발을 발표한 것은 ‘노풍’을 잠재우기 위한 ‘북풍’에 힘을 실어주는 모양이라는 것. 무소불위한 권력을 쥐고 있는 북한 보위부와 달리 김씨의 간첩활동은 다소 엉성하다는 지적이다. 논란이 되고 있는 김씨의 과거 행적을 추적했다.


중국 관광객으로 위장한 공작원들, 전세기 태워 남한 침투 계획
북한에 보고된 서울메트로 내부 문건으로 ‘지하철 테러’ 노출돼


북한의 국가안전보위부(이하 보위부) 요원은 사격술, 미행술, 심리술 등 각종 특수 훈련으로 다져진 전천후의 요원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북한군 출신인 김미화는 특수훈련을 거치지 않고 보위부 공작원이 됐다.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했다.

당초 교도대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제약공장 약제사로 근무한 김씨는 1990년대 중후반 가뭄과 홍수로 인한 극심한 식량난이 빚어진 일명 ‘고난의 행군’ 시기에 여러 지역을 오가며 장사를 시작했는데, 1997년 7월 장사를 위해 열차를 타고 청진으로 가던 도중 조선노동당 당원증을 분실하면서 인생의 고비를 맞게 됐다. 북한에서 당원증의 분실은 당에 대한 ‘충성심’이 없다는 것을 의미해 중한 처벌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당원증 분실로 덜미 잡힌 13년


이때 군 장교 출신인 김씨의 아버지가 보위부에 들어갈 것을 권유했다. 보위부에 들어가면 처벌을 면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김씨는 보위부 공작원으로 일할 것을 약속했다.

이후 김씨는 중국을 드나들며 한중 관계에 대한 첩보수집 및 마약밀매에 관여했다. 때문에 중국 공안당국에 체포돼 세 차례 북송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중국동포나 장자제 지역 원주민인 투지아족 등으로 신분을 위장하면서 간첩활동을 이어갔다.

김씨의 활약에 가장 큰 도움이 됐던 사람은 오모(52)씨였다. 2006년 2월 중국 후난성 장자제에서 호텔 경리직원 등으로 일하던 김씨는 인터넷 채팅을 통해 오씨를 만난 뒤 그해 5월 중국으로 초대했다. 사업 구상차 중국을 찾았다가 김씨를 만난 오씨는 귀국 후에도 인터넷 채팅을 통해 연락을 계속해서 주고받았다. 사실상 연인관계로 발전한 셈. 이듬해 6월 또다시 중국을 찾은 오씨는 김씨와 동업을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퇴직 후 중국에 정착할 마음이었고, 김씨의 제안대로 유명 관광지에 5성급 호텔을 지으면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오씨는 같은 해 7~8월 여관과 호텔 신축비 명목으로 두 차례에 걸쳐 미화 27만 달러(한화 3억여원)를 송금했다. 급기야 2007년 말에는 오씨를 대표로 한 H여행사가 설립됐고, 김씨는 오씨 등으로부터 소개받은 국내 여행업체와 관광객 모집을 위한 합의서를 작성했다.

물론 김씨의 계획은 달랐다. 국가공무원들의 중국 방문을 알선해 이들의 신상정보를 빼내고 국내 동향을 입수하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 실제로 김씨는 공무원 6명이 포함된 한국인 관광객 24명의 명단을 넘겨받아 보위부에 제출하고, 이들의 중국 관광을 주선하는 등 여행사업을 통한 첩보 활동에 착수했다.

또 이 과정에서 김씨는 오씨에게 자신이 북한 공작원이라는 사실을 밝혔던 것으로 조사됐다. 김씨는 자신이 쓴 자서전 형식의 비망록을 오씨에게 읽게 한 뒤 “장자제에서 호텔 신축을 하다 보위부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안 중국 안정국에서 업신여겨 망하게 됐다”면서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북한의 도움이 필요한데, 보위부에 내 신분에 걸맞는 한국 정보를 갖다줘야 한다”고 말했다는 게 김씨의 설명이다.

이에 오씨는 당시 근무하고 있던 서울메트로 종합사령실 컴퓨터에서 문건을 빼돌려 김씨에게 전해줬다. 오씨가 넘긴 문건은 300여 쪽에 달하는 서울메트로 대외비 문건으로 비상연락망, 승무원 근무현황표, 위기상황 발생시 대응방안 등이 포함돼 있다.


한국 관광객 대상으로 여행업 활발


오씨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김씨가 계획한 여행사업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영업부진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과 지병인 간경화 증세 등으로 호텔을 완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김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2008년 3월 보위부 간부 지도원으로부터 보위부 공작원들을 중국 관광객으로 위장해 남한에 침투시키는 방안을 강구하라는 지령을 전달 받자 한국 관광객 대상의 여행사업을 다시 기획했다.

이번엔 전세기를 띄우겠다는 복안이었다. 돌아가는 전세기 편에 보위부 직원들을 중국 관광객으로 위장시켜 국내에 잠입시키려 했던 것. 실제 김씨는 오씨를 이용해 직간접적으로 국내 여행사와 접촉했으며 지난 2008년 하순부터 전세기를 띄우기 위해 중국 관광상품을 만들어 한국 내 관광객들을 모집하려 했다.

한국으로 잠입한 것은 2009년 9월이었다. 그해 3월 보위부로부터 “한국에 가서 활동하라”는 지령을 받은 김씨는 라오스 주재 한국대사관에 도착한 뒤 탈북자로 위장했다. 국가정보원은 김씨를 신문하는 과정에서 의심스러운 점을 발견했지만 증거가 확실치 않아 일단 풀어준 뒤 감시를 계속해왔다. 국내 간첩망과 접선 경로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러다 김씨가 최근 해외로 도피할 조짐을 보이자 지난 5월20일 체포했다.

현재 공안당국은 이번 사건은 ‘제2의 원정화’로 명명하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사건을 수사 중인 공안당국 관계자는 “김씨와 원정화는 똑같이 북한 보위부에서 내려 보낸 여간첩으로 직위나 나이뿐 아니라 간첩활동의 수법까지 비슷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성’을 미끼로 뭇남성들을 유혹하고 간첩활동을 펼쳤다는 것. 보위부에 선발된 경위도 비슷하다.

김씨가 어려운 시절 장사로 생계를 이어가던 중 당원증을 잃어버린 책임을 무마시키기 위해 보위부 공작원이 된 것처럼 원씨 역시 북한에서 아연 5t을 훔쳤다가 절도 범죄를 무마하는 과정에서 보위부 공작원으로 발탁됐다. 또 김씨의 부친이 북한 인민군 장교와 초급 당비서까지 지낸 ‘엘리트 계층’이었다는 점도 남파 도중 살해된 북한 특수공작원을 아버지로 둔 원씨의 사례와 비슷하다.

김씨의 지난 행적이 베일을 벗으면서 공안당국은 사실상 비상사태에 돌입한 형국이다. 김씨가 북한에 보고한 것으로 알려진 서울메트로 내부 문건으로 ‘지하철 테러’에 노출되어 있다는데서 긴장감을 늦출 수 없는 상황인 것. 오는 11월 서울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지하철 테러에 이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공안당국의 설명이다.


‘은밀한 부위’ 보여주며 뭇남성 포섭


뿐만 아니다. 조사결과 김씨의 전세기 계획이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다른 경로를 통해 국내에 잠입한 북한 보위부 공작원이 상당수에 이를 것으로 공안당국은 판단하고 있다. 더욱이 김씨가 보위부에서 공작원들을 남한에 침투시켜 장기 체류하는 동안 사업을 할 수 있는 방안에 모색하라는 지시까지 받은 것으로 밝혀지면서 파문을 몰고 왔다. 공작원 사업이 간첩 활동은 물론 마약유통 등 사회 혼란성 범죄까지 포함됐을 가능성이 높은 만큼 공안당국은 김씨가 급하게 제3국으로 출국하는 과정에서 국내 고정간첩과 접선했는지 그 여부에 대해서도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선 여전히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김씨가 접촉한 대학생 이모(29)씨로부터 국내 유명 대학의 현황을 넘겨받은 게 의혹의 첫 단추다. 김씨는 2006년 3월 이씨에게 중국 관광을 권유하면서 접근했지만 일이 성사되지 않자 화상을 통해 자신의 신체 은밀한 부위를 보여주며 국내 대학 정보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김씨가 이씨를 통해 얻어낸 정보는 대학의 위치와 홈페이지 주소에 불과했다. 화상채팅과 메신저를 이용해 뭇남성을 포섭할 만큼 인터넷을 다룰 줄 아는 김씨가 검색을 통해 충분히 알아낼 수 있는 정보를 자신의 은밀한 부위까지 보여주며 포섭하려 했다는 사실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더욱이 실총도 아니고 가스총을 구입하지 못해 이씨에게 부탁했다는 얘기는 신빙성마저 떨어진다. 보통은 간첩을 잡고도 평일에 발표하는데 이례적으로 휴일에 발표한 것도 의심을 사고 있다. 천안함과 함께 북풍 효과를 내기 위한 공작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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