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인간 소모품

〈전편 이어서〉

“야 이년아, 내가 소새끼냐? 맨날 풀만 먹고 힘든 일을 어찌 허란 거여, 응?” “나두 옛날에 친정에서마냥 고기 지글지글 볶아설랑 이밥이랑 먹고 싶어! 흥, 돈만 준다면 뭘 못할까?”

얼굴이 누렇게 뜬 아낙네는 등짝에 감기 걸려 칭얼대는 어린애를 업은 채 대꾸했다.

“또 쥐뿔도 없는 친정 타령이네. 난 한번 본 적도 없는 처갓집을 왜 들먹이냐? 허무맹랑한 소리 하지 말고, 내일은 제발 좀 병아리라도 한 마리 잡아 몸보신 좀 시켜라, 응?” 청운은 어른이 밥상 앞에서 아이처럼 반찬 투정이나 부리는 꼴을 뭐 그다지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는 맑은 우물물로 입가심을 하며 생각에 잠겼다.

‘만약 내가 보리밥이나 채소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정말 짜증나고 고역이겠지. 하지만 난 사실 쌀밥이나 고기를 먹긴 하지만 그닥 좋아하진 않아. 어릴 때부터 간혹 잔칫날에 쌀밥과 쇠고깃국이 나오면 왠지 식욕이 사라져…… 가난한 동무네 집에 가서 보리밥에 풋고추 된장국을 비벼 맛나게 먹곤 했지. 그래서 엄마는 쌀을 한 봉지 담아 주며 동무네로 보내곤 했어. 그땐 아직 가세가 기울지 않은 때였으니까. 물론 나도 가을날 저녁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햅쌀밥을 구수한 고깃국에 말아 먹는 맛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아마 내 체질엔 아닌 것 같아.’

그 무렵, 가난한 깡촌 농가에서 태어나 구국 혁명으로 대통령이 된 위대하신 분은 티브이, 라디오, 신문 등을 통해 자주 모습을 나타내었다. 특히 밀짚모자를 쓰고 모내기를 하다가 논둑에 앉아 늙수그레한 촌로들과 함께 막걸리를 마시는 장면은 농민뿐만 아니라 도시로 나가 살던 자식들에게도 진실하고 순박한 인상을 심어 주어 거의 전국민적인 지지와 앙망을 받았다. 청와대라는 대궁궐에 앉아서도 늘 세 가지 소찬으로 식사를 한다는 뉴스는 가랑잎 같은 서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지니게 했다. 언론은 늘 그런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그분은 공업입국이란 기치를 내걸고 농업을 희생시켜 나갔다. 수많은 농민들이 땅을 잃고 유랑민이 되어 떠돌다가 도시로 들어가 하층 노동자로 전락했다.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이라 일컫는 농업과 농민을 말살한 것은 대불충·대불효 죄로 미래에는 역사적 심판을 받을지도 모른다.

*농촌 희생 정책은 오늘날에도 계속 유지되고 있다. 미국이나 일본, 프랑스, 영국 등 선진국에서는 식량 자급뿐만 아니라 농촌의 자연친화적 가치를 중시해 농업을 미래의 블루오션으로 설정해서 대규모로 투자하고 있는데 한국은 거꾸로 가고 있다. -지은이 주

다른 건 제쳐두고 혁명 대통령의 식성에 대한 청운의 의견은 벽돌공장 사장의 견해와 좀 달랐다. “그분이 애처로운 국민들과 고락을 같이 한다구요? 예, 아마 그렇겠죠. 하지만 원래 그분은 막걸리를 좋아해서 특별히 최고급품을 만들어 진상하는 술도가를 지정해 두었다고 합디다. 잡곡밥이나 국수, 서너 가지 소찬은 허례허식을 싫어하는 그분의 성격에 딱 맞았을 거예요. 그런 분에게 지나친 진수성찬은 오히려 식욕을 방해할 수도 있단 말입니다.”

주지육림

“그래서, 그게 나쁘다는 얘기여 뭐여?” 대통령과 이름이 비슷한 벽돌공장 박정휘 사장은 입에서 침을 튀기며 말했다. “좋아하는 음식을 그냥 조용히 잡수면 되지 왜 자랑을 하고, 더 나아가 국민들에게까지 혼분식을 하라고 강요하느냔 말입니다.”

“그거야 언론이 나서서 한 짓이지, 대통령 각하께서는 그냥 가만히 계셨다구.”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것, 그건 바로 속으로 웃으면서 허락하는 것이죠. 정말로 속이 진실한 분이라면 그따위 쑈를 반복하지 말고 그만두라고 지시했어야죠. 그런데 사실은…… 비밀스런 아방궁에서 매주마다 예쁘고 귀여운 아가씨들을 불러 놓고 양주 파티를 벌인다고 하더라구요.”

“흠, 주지육림 소문 말이로군. 얌마, 그건 다 나쁜 놈들이 지어낸 유언비어야!” 박정휘 사장은 마치 자기가 모욕을 당하기라도 한 듯 흥분하며 주먹을 흔들어댔다. “나도 긴가민가하지만, 굴뚝에서 연기가 괜히 나겠어요? 자기는 식성대로 자유롭게 먹으면서 국민에겐 하급품으로 강요하는 건 독재정치죠.”

청운은 선감도에서 선감학원 원장이나 사감들이 하던 짓을 떠올리며 말했다. “이 친구 이거 어린 녀석이 못하는 소리가 없군. 혹시 빨갱이 아녀? 흠, 어딘지 수상쩍구먼.” 청운은 미간을 찌푸렸다.

“몇 년 전에도 데모를 하다가 육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고 하더라구요.” “뭐? 왜?”“먼 일제시대에 일본 놈들이 우리 국민들을 개돼지처럼 취급했다잖아요. 그리고 우리 소녀와 처녀들을 강제로 끌고 가 일본군인의 위안부로 삼고…… 남자들은 징집하여 혹독한 강제노동을 시켰다고 해요.”

“그래서?” “그런데 대통령이 한일회담을 해서 거액의 돈을 받고는 그들의 죄악을 무죄로…… 면죄부를 주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국민들이 큰 데모를 했다던데, 아저씨는 모르세요?”

“음, 흠…… 무슨 필요한 이유가 있었겠지, 괜히 대통령께서 그랬겠나.” “국민들의 뜻을 무시해 버리고 자기만 옳다고 하면 독재죠. 마치 미식가처럼…….” 그 당시엔 빨갱이로 한번 낙인찍히면 뼈도 추리지 못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시골 주막에서 막걸리를 마시다가 얼떨결에 한 마디 정부를 비판하기라도 했다간 이른바 ‘막걸리 반공법’에 걸려 치도곤을 당했다.

이튿날 청운은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혹시 경찰에 걸려 무슨 짓을 당할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바닷가 마을을 지나, 5.16혁명 후 깡패들을 잡아들여 건설케 했다는 도로를 걸어 제주도를 떠났다. 그때의 그 보리밥과 상추쌈 맛이 입안에 맴돌았다.

식사를 마친 청소년 대원들은 밖으로 나가 잠시 자유 시간을 가진 후 다시 모여 내무반으로 들어갔다. 침상 앞 공간에 두 줄로 선 채 검정 모자의 지시대로 점호를 받았다. 식곤증 탓인지 군기가 빠진 애들은 서너 명의 조교로부터 구타를 당하고 조인트를 까였다.

“이제 너희는 일반인이 아냐! 언제라도 목표물을 향해 날아갈 수 있는 칼날이 돼야 한단 말야, 알았나?” “예!” “좋아, 그럼 오늘만큼은 첫날이니 서로 소개도 하고 장기자랑도 하면서 놀아도 좋다. 단, 풍기문란이나 소란을 떨었다간 즉시 지옥행임을 명심해라!” 검정 모자는 수하들을 데리고 나가 버렸다.

해변의 여인

어둑해졌기 때문에 반장이 알전구를 켰다. 발전기를 돌려서 켠 전등은 흐릿하고 깜빡깜빡했다. 그래도 자유를 얻은 청춘들은 불안스런 내일을 잊으려는 듯 짐짓 즉물적인 동물성을 드러내며 허세를 떨기도 했다.

“자, 그럼 이제부터 각자 소개를 하고 장기자랑도 멋지게 해보기 바란다.” 반장이 말했다. 좌중엔 잠시 침묵의 틈이 생겼다. 마침 소쩍새가 구슬피 울어 그 정적의 틈을 메워 주었다.

그때 1번이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좆같은 인생, 빠따도 먼저 맞으라드만. 그런데 난 세상 살면서 한번도 1번이 돼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갑자기 많이 속으로 떨리더군. 좀 겸연쩍기도 하구 말야. 그런데 난 어느 순간 결코 안 떨기로 작정해 버린 거야…… 여러분, 과연 왜 그랬을까?”

“왜 그랬지?” “그래봤자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깨달음이 온 거야. 씨팔, 내가 좆나게 떨든 말든 대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냔 말야. 차라리 설령 호랭이가 옆에서 으르렁거리더라도 무덤덤히 있는 게 조금이라도 이익이라는 얘기지. 담력이나 통찰력을 평가받을 수도 있고 말야.”

“호랑이가 들으면 웃것다. 씨잘데 없는 소릴랑 집어치우고 장기자랑이나 한번 해보랑께.”“장기자랑의 목적은 자기 자랑보다는 여러 동지들을 즐겁게 해주는 데 있다는 점을 1번으로서 우선 밝혀 두면서…… 아, 나야 뭐 별 장기랄 것도 없으니, 그냥 실제로 체험했던 이상야릇한 얘기나 한번 해볼란다.”

그는 혀로 두툼한 입술을 축였다. “빨랑 본론으로 들어가랑께.” “내 꿈은 영화배우였어. 나의 고독한 눈빛과 코에서 입가로 흐르는 윤곽선에 알랑 들롱의 이미지가 보이잖는가? 야, 웃지들 마, 웃지 말라구. 그래, 쓰벌…… 입술만은 좀 다르다는 사실을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프랑스 사람과 조선 토종이 똑같을 순 없잖아. 난 하나의 개성이라고 생각할 뿐이야.”

“그래, 아무튼 웃겨 주니 좋긴 해, 깔깔…….” “여러분, 난 웃음을 주려는 게 아니라, 애틋한 진실을 얘기하려는 거야. 알랑 들롱이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는 부모조차 잘 모르는데다 고등학교를 겨우 중퇴한 사람이야. 고독한 야생 들고양이처럼 암흑가의 뒷골목을 헤매 다니다가 그 유명한 외인부대에 들어갔지. 그때의 경험이 없었다면 그가 태양은 가득히 같은 명화에서 보여 준 박진감 넘치는 연기를 과연 펼칠 수 있었을까?”

“그건 모르지. 아무튼 그래서 너도 이곳을 외인부대라고 공상하면서 온 거란 말야? 그런 시시껄렁한 우스갠 집어치워, 임마!”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청운은 문득 선감도의 피에로 형이 생각나 한숨을 쉬었다. 일상생활 자체를 영화라고 환상하던 그는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아따, 됐고…… 그럼 지금부터 본방송을 시작하겠다. 웃다가 감동 먹고 질질 짜지나 말어.”

“걱정을 접어 둬.”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은 했는데 똥통급이라 공부보다 놀기가 더 좋더군. 아마 그때 알랑 들롱이 없었다면 난 개구신 짓이나 하다가 자살해 버렸을지도 몰라. 셋방에 살다가 연탄가스에 중독돼 반병신 꼴이 된 홀엄마…… 그런데도 어쩌든지 엄마는 날 공부시키기 위해 새벽 일찍 일어나 밥을 짓고 낮엔 붕어빵 장사를 했어. 어느 날 밥을 먹는데…… 배추 된장국에서 누에보다 통통한 초록색 배추벌레가 나왔어. 그걸 건져내면 되고…… 지금 생각하면 그냥 먹어도 좋을 텐데…… 그땐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숟갈을 탁 놓고 말았거든. 난 학교에 가지 않고 강가로 나가 조약돌로 내 이마를 마구 때렸지…… 다음날에도 엄마는 쓸쓸한 표정으로 새벽밥을 준비했어. 그 모습이 너무 애처로워 보여서 난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장을 꼭 따겠노라고 엄마에게 약속한 후 똥통학교를 자퇴하곤 내가 직접 붕어빵을 구웠지. 내가 겁 없이 그런 데는 알랑 들롱의 영향도 컸던 것 같아. 고등학교든 대학교든 졸업보다는 중퇴가 뭔지 강렬한 맛이 있어 보였거든.”

“아 참, 그 녀석 사설 한번 무척 길군.” 누군가 불평을 했다. “여러분들이 영화를 보든 책을 읽든 이야기를 듣든, 너무 재미있는 것만 찾다가는 나중에 남는 게 없어. 중간중간 시시한 듯한 이야기가 사실은 양념 역할을 해준단 말씀이야. 아무튼…… 그 후 엄마는 속으로 상심이 컸든지 점점 허약해졌어. 그런 어느 날, 시장에 가서 밀가루를 한 포 사 들고 오는데 엄마가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거야. 정신을 잃은 채 입가에 거품을 문 엄마를 가슴에 안고 흔들었지만 소용이 없었어. 엄마는 내 외침에 대답하려는지 입술을 살짝 벌렸으나 갑자기 파르르 떨며 혀를 반쯤 내민 채 앞니로 꽉 깨물었어. 난 어떻게든 내 손가락이나마 넣어 엄마의 혀를 살려 보려 했으나 엄마는 입가에 붉은 피를 흘리며 숨이 끊어지고 말았지.”

그는 입을 꽉 다문 채 코로만 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번엔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나중에 들어 보니…… 족제비털 목도리를 두른 어떤 중년 여자가 붕어빵을 한 봉지 달랬다가…… 엄마가 성한 한쪽 손을 떨며 뻣뻣하게 내미니까 재수 없다면서 홱 밀치고 갔다는 거야. 난 골목길을 잠시 훑어본 뒤 큰길 쪽으로 허겁지겁 뛰어갔는데…… 검은 목도리를 걸친 여자가, 엄마를 죽였을지도 모를 그 여자가 택시를 잡아 타고 사라지는 걸 봤을 뿐이야.”

“영화도 저런 식으로 오락가락하면 극장이 텅 빌 텐데.” 누군가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들어 보고 시시껄렁하면 몰매를 주던지 하자구. 참 네미랄…….” “난 그래서…… 여자라는 존재에 대해 애증의 두 가지 감정을 지니고 있는지도 몰라. 애정도 증오도 더 찾아가거나 다가갈 수 없는 아득함…… 난 죄책감 속에서 방황하다가 외사촌 형이 중국집 주방장으로 있다는 부산으로 갔어. 역전에서 전화를 걸었더니 남포동으로 오라고 하더군. 너무 일찍 갈 필요는 없겠다 싶어서 바다 냄새가 조금쯤 섞인 공기를 마시며 슬슬 역전 광장을 거니는데…… 어떤 여자가 다가왔지.”

“알았으니 그만해. 어디서 많이 들은 냄새가 풍기는걸.” “아니, 이건 정말 내 체험이야. 진짜 야릇해. 여자는 길고 고불고불한 머리칼에 살짝 가려진 하얀 얼굴이 좀 외로워 보였어. 몸에 딱 맞는 검정색 원피스를 걸쳐 가냘프면서도 육감적인 몸매가 잘 드러났지.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모습이었어.”

“매춘부였나 보네 뭐.” “그런 평범한 얘기라면 애당초 내가 꺼내질 않지. 여자는 어두운 빛이 깃든 큰 눈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나랑 같이 가지 않을래?’ 하고 앵두 같은 입술로 묻더군. ‘어디로……?’ 가능한 여운을 남기며 나는 대답했지. 여인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어. ‘눈이 참 쓸쓸해 보이는구나.’ 그 순간 나는 양갈래 길에서 반평생 동안 할 고민을 다 한 것만 같아. 삶이냐, 죽음이냐?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애들을 홀려 데려가서 도끼나 톱으로 팔다리를 잘라낸 뒤 불쌍한 앵벌이 노릇을 시킨다고 들은 적이 있거든. 정말 심장이 떨리더군. 그 천당과 지옥이 엇갈릴 찰나 속에서 갈등하던 나는 선뜻 한 걸음 내딛어 그녀의 팔짱을 꼈어. 운명적인 그 순간 나를 나서게 한 것은 바로 알랑 들롱이었지.”

 

작가- 김영권

진주에서 태어나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했다. 이후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으며『작가와 비평』지의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다른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仙甘島 수용소의 비밀」 「보리울의 달」 등이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취재해서 르포 「시장의 하루」 「보통사람들의 오아시스」등을 썼다.

현재는 「지옥극장」 시리즈 제3탄 「몽키하우스」를 집필중이이며, 앞으로도 계속 우리 사회의 감춰진 진실을 찾아 드라마틱하게 소설화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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