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체험 당사자인 기자가 인쇄소에서 재단, 검수, 포장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심지연

[민주신문=신상언 기자]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만연한 풍경이 익숙해져버린 시대가 됐다. 전자기기의 발달로 읽고 쓰는 일을 종이가 아닌 스크린이 대체하고 있다. 

종이로 된 인쇄물이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여전히 종이와 잉크로 된 인쇄물을 생산해내며 활자시대를 이어가고 있는 이들이 있다.

2000년대 중반 들어 정부는 출판·인쇄업 부흥을 위해 파주에 출판 단지를 조성했다. 

현재 이 곳에는 출판사뿐만 아니라 200여개의 인쇄소 등 1000개 이상의 출판·인쇄 관련 회사가 몰려있다. 거대한 마을과도 같은 이 곳에 위치한 18년 전통의 인쇄기업 ‘상림문화’가 오늘 체험 장소다.

7시 반까지 출근하라는 인쇄소 부장님의 말씀에 새벽같이 집을 나섰다. 집에서 경기도 파주시에 위치한 상림문화까지 출근하는 데 거의 2시간이 걸렸다.

처음 마주한 인쇄소에서 기자를 반겨준 건 시큼한 잉크냄새와 인쇄할 때 발생하는 소음이었다. 인쇄소만의 정취가 느껴졌다. 부장님의 안내를 받아 인쇄소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것으로 체험을 시작했다.

처음 들른 곳은 디자인 등 기초 작업을 하는 디지털실이었다. 디지털실까지 갖춰 직접 시안 작성과 디자인까지 담당하는 곳은 흔하지 않다는 설명이다. 

디자인 작업은 기자가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기자를 위한 일은 디자인의 다음 단계인 인쇄, 검수, 포장 작업 등이었다.

1층 인쇄실에서 본격적인 일을 시작했다. 5m는 돼 보이는 거대한 인쇄기가 뿜어내는 소리에 압도당했다. 귀마개 사이로 흘러 들어오는 소음이 익숙해지기도 전에 종이 쌓기 작업에 투입됐다. 종이 쌓기 작업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정교한 기술이 필요한 작업이다. 인쇄소의 모든 작업이 기술을 요하고 각 작업 파트마다 ‘장’이 되기 위해서는 10년 이상의 경력이 필요하다.

1m가 넘는 종이 수만장을 1㎜의 오차도 없이 차곡차곡 쌓아올리려면 ‘공기 반, 힘 반’이 필요하다. 종이 수백장을 들어 올리면서 손목의 스냅으로 공기를 넣어야 작업대에 올려놓을 때 흐트러지지 않고 쌓을 수 있다.

오전 대부분을 종이와 씨름하다보니 생경한 소음이 어느새 익숙한 자장가처럼 느껴졌다. ‘공기 반, 힘 반’ 스킬이 몸에 익을 때쯤 점심시간이 됐다. 

직원 분들과 이야기를 나눌 절호의 기회였다. 회사 3층에 마련된 식당에서 함께 점심을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가족

재단과 포장 작업의 파트장인 이정열(57/남)씨는 “인쇄업은 3D 업종 중 하나다. 냄새와 소음 속에서 하루 종일 서서 일해야 한다”며 “예전에 서울 충무로 작업장에서 일할 때는 장소가 협소해서 지금보다 더 악조건이었다. 파주로 이주한 후에는 작업장이 넓어져 만족하면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힘든 일을 하는 만큼 인쇄소 직원들은 모두가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일하고 있었다. 오후에는 같이 점심식사를 했던 이정열씨가 담당하는 재단과 검수 작업에 투입됐다. 

오전 작업보다 작업 환경은 쾌적했지만 사실 ‘무서운’ 작업이었다. 인쇄된 종이를 일정한 크기로 자르는 재단 작업은 커팅 기계를 다뤄야 해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기자는 안전을 위해 재단 작업의 보조로 투입됐지만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위험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재단 작업 담당인 우익제(54/남)씨는 능숙하게 재단작업을 해 나갔지만 처음부터 능숙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인쇄소에 취직해 30년이 넘었다”며 “사실 군 전역 후 재단작업을 하다가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를 겪었다”고 말해줬다. 이제는 아물었지만 사고 당시 흔적이 느껴지는 그의 상처에는 인쇄 기술자가 되기 위해 겪어야 했던 그간의 노고가 담겨 있는 듯했다.

재단은 위험한 작업이라 오래 할 수 없었던 관계로 검수와 포장 작업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상림문화 인쇄소만의 특색은 상품권, 라벨 인쇄 등 특수 기술이 필요한 인쇄도 전문적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베지밀’ 병에 붙이는 라벨의 원본을 검수하는 일은 육체적으로는 부담이 없었지만 세심함과 꼼꼼함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수천장의 라벨을 검수하면서 잘못 인쇄된 부분을 찾아내는 것은 ‘틀린 그림 찾기’를 하는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한 장이라도 검수를 잘못해선 안 됐기에 집중 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파트장은 “라벨과 상품권 인쇄를 하는 게 우리 회사의 장점이었지만 상품권 등도 이제 모바일로 대체돼가고 있다”며 “인쇄업은 하향세에 접어들어 1년~2년 전부터 물량이 줄어들고 있다”고 한탄했다. 쇠퇴해가는 인쇄 산업의 분위기가 그대로 전달됐다. 안타까웠다.

하루 종일 인쇄소 이곳저곳을 정신없이 체험하다보니 오후 6시가 다 됐다. 교대 시간이 돼 하루 종일 기자를 돌봐준 부장님과 인사를 나누고 체험을 마쳤다.

부장님은 체험에 대한 소회를 물으면서 “종이로 된 책을 본다는 건 인간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업종에 몸담고 있는 것에 자부심과 사명감을 느끼고 있다”며 “요즘 지하철을 타면 신문과 책을 보는 사람은 없고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모습이 삭막하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인쇄소 문을 나서면서 저물어가는 활자시대가 새삼 아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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