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사진은 조성진 LG전자 부회장, 가운데는 양향자 전 삼성전자 상무, 오른쪽은 장천순 두산중공업 기술상무.

[민주신문=신상언 기자] 지난해 기준 국내 30대 기업 임원은 총 3342명이다. 전체 직원 대비 0.47%가 채 되지 않는다. 

한국경영자총협회 조사에 따르면 신입사원 1000명 중 7.4명만이 임원이 된다. 한마디로 낙타가 바늘구멍 뚫기보다 어려운 것으로 여겨진다.

더욱이 0.47%의 확률을 뚫고 임원이 된 이들 중에는 고졸 출신으로서 그 어려운 일을 해낸 사람들도 있다. 지난해 30대 기업의 임원 중 고졸 출신은 단 5명에 불과했다.

0.001%에 해당하는 극한의 확률이다. 사람들은 그들은 ‘고졸신화’라고 부른다.

조성진 LG전자 부회장(용산공고)과 김용희 삼성물산 상무(서울북공고), 황대환 삼성전자 상무(수도전기공고), 남정현 삼성전자 상무대우(천안공고), 한준성 하나금융지주 전무(선린인터넷고)가 대표적인 고졸신화의 주인공들이다.

여성 고졸자 중 임원의 반열에 오른 이는 극히 드물다. 30대 기업의 임원 중 고졸 출신 여성 임원은 전무한 상태다. 과거의 기록까지 살펴보면 양향자 전 삼성전자 상무 정도가 있을 뿐이다. 

30대 기업에서 범위를 조금 넓혀보면 김남옥 한화손해보험 전무위원이 있다. 특히 그는 중졸 출신이다.

더구나 대졸자 중심의 채용 문화가 굳어지면서 향후 고졸 출신이 임원에 오르는 것은 더욱 힘들어질 것으로 보인다. 1970~80년대에는 고졸 출신에게도 많은 기회가 주어질 수 있었고 주경야독을 통해 학력의 한계를 극복해나가기도 했지만 현재는 그마저도 불가능에 가깝다.

최근 들어 학력 파괴 바람이 불면서 마이스터고 졸업생을 중심으로 한 고졸 채용이 늘고 있지만 이 마저도 미미한 실정이다. 

27일 교육부에 따르면 2013년 720명이었던 은행권 고졸 취업자 수는 올해 절반 수준인 400명으로 줄었다. 이제 고졸 신화는 더 이상 나오기 힘들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재계

지난해 기준 30대 기업의 고졸 출신 임원은 총 5명. 그 중 가장 유명세를 치른 이가 바로 조성진 LG전자 부회장이다. 그는 지난해 12월 홈어플라이언스&에어솔루션 사업본부장으로 재직하다 새로운 CEO로 선임됐다.

조성진 부회장은 1976년 용산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9월 금성사에 입사했다. 당시 전자산업에서 전도유망한 제품은 선풍기였지만 조 부회장은 세탁기 설계실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대한민국의 세탁기 보급률은 0.1%도 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전도유망한 품목으로 떠오를 것이란 걸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탁기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그는 입사 이후 36년이란 긴 세월동안 세탁기와 씨름하며 다양한 제품 개발에 기여했다. 

1998년에는 세계 최초로 DD모터가 장착된 세탁기를 상용화시키는데 성공했다. 이후 2005년에도 세계 최초로 듀얼분사 스팀 드럼세탁기를 출시했다. 이밖에도 ‘6모션 세탁기’(2009), 상단 드럼세탁기와 하단 미니워시를 결합시킨 ‘트원워시’(2015) 등을 선보이면서 LG 세탁기를 세계 최고 반열에 올려놓는데 큰 공헌을 했다.

조 부회장은 2013년 홈어플라이언스 사업본부장을 맡으면서 LG 생활가전 사업 전반을 책임지게 된다. 세탁기뿐만 아니라 냉장고·에어컨을 망라하는 중책이었다. 하지만 그는 사업본부장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내며 LG 생활가전 사업부의 체질을 100% 바꿔 놓는데 성공했다. 

조 부회장의 이러한 성과와 노력은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다. 세탁기 사업부에서 일할 때인 입사 초기부터 10년간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본을 150여 차례 이상 드나들었다.

뿐만 아니다. 그의 집에는 시제품 세탁기가 6~7대나 있을 만큼 열정적으로 일했다. 집에서 직접 사용해보면서까지 제품 개발에 몰두한 것이다. TV 광고 모델로 몸소 출연한 적도 있다. 그의 고졸신화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노력과 열정의 결과물인 셈이다.

2015년 임원으로 승진한 황대환 삼성전자 무선 글로벌제조센터 담당임원 상무도 고졸 출신이다. 그는 수도전기공고를 졸업했다. 1924년 개교한 수도전기공고는 졸업생 대부분이 철도국, 한국전력 등에 취업하는 명문 공고로 유명세를 떨치기도 했다.

또 김용희 삼성물산 상무(서울북공고), 남정현 삼성전자 상무대우(천안공고), 한준성 하나금융지주 전무(선린인터넷고) 등이 현재 임원으로 재직 중인 30대 그룹의 고졸신화 주인공이다. 

30대 그룹에서 조금 범위를 확장해보면 이경재 오리온 사장도 고졸 출신이다. 그는 1977년 배명고를 졸업한 뒤 입사해 영업통으로 이름을 날리며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기술·생산

기술·생산직 등 현장 근로자로 시작해 임원의 자리에 오른 이들도 있다. 이들은 고졸 출신 일반 사무직 근로자들이 임원에 승진한 비율보다도 훨씬 더 적지만 전문성을 인정받아 임원의 자리에 올랐다.

지난해 3월 두산중공업에서는 기술직 출신 임원이 탄생했다. 터빈2공장장 장천순 부장이 기술 상무로 승진한 것이다. 그는 1980년 청주공고를 졸업하고 두산중공업에 입사했다. 이후 30여 년간 터빈·발전기 분야에서 노력해온 결과 고졸 신분이라는 한계를 뚫고 기업의 별인 임원으로 승진했다. 두산중공업은 지금까지 2명의 기술상무를 임원으로 승진시켰다.

올해 현대중공업이 발표한 정기 임원인사에서도 처음으로 생산직·고졸 출신 임원이 탄생해 눈길을 끌었다. 주인공은 박삼호, 김병호 상무다. 박삼호 상무는 조선분야, 김병호 상무는 해양 플랜드 분야의 생산직으로 입사해 40여 년 이상 근무해왔다.

박 상무보는 1975년 18세의 나이로 현대조선에 입사했다. 남들보다 많이 배우지도 학력이 높지도 못했지만 패널, 조립 등 선박 분야의 생산 업무에서는 자타공인 1인자로 정평이 나있었다. 2015년 부서장으로 승진해서도 맡은 분야에서 승승장구한 결과 내업 부문(선박 블록을 만드는 공정) 담당 임원으로 발탁된 것이다.

올해 나란히 상무로 승진한 김병호씨도 박 상무보와 동일한 해인 1975년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현대중공업에 입사했다. 그 역시 40여 년간 다양한 공사현장을 다니며 한 분야의 베테랑으로 인정받아왔다. 김 상무보는 고졸이지만 입사 후 25년 만에 학사를 취득했다. 울산과학대학교에 진학해 2000년 졸업했다.

유리천정

현재 30대 기업 임원 중 고졸 출신 여성은 없다. 지금은 정치권에 몸담고 있는 양향자 전 삼성전자 상무가 고졸신화를 쓴 인물로 알려져 있는 정도다. 

범위를 조금 넓히면 김남옥 한화손해보험 상무보, 손영선 신세계백화점 상무보, 김희경 롯데쇼핑 상무보가 있다. 하지만 남성에 비해 현저히 적은 게 지금의 현실이다.

양향자 전 삼성전자 상무는 광주여상을 졸업하고 1985년 삼성반도체 메모리설계실에 입사하게 된다. 그의 직책은 연구원 보조였다. 연구원들을 보조하고 필요한 모든 것들을 지원하는 업무였다. 

고졸 출신으로 전공지식이 없던 양 전 상무에게는 어렵고 버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2000년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SRAM 설계팀 책임, 2008년에는 DRMA 설계팀 수석 자리를 거쳐 2013년 Flash 설계팀 상무로 승진하게 된다. 수많은 시련을 견디고 입사 28년 만에 임원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양 전 상무가 임원이 되기까지 피나는 노력이 뒤따랐다. 하루에 14시간 이상 일을 하면서도 일본어 공부에 매진했다. 

1995년에는 삼성전자기술대 반도체공학 학사를 따냈고 2005년에는 한국디지털대 인문학 학사를, 2008년에는 성균관대 전기전자컴퓨터 공학 석사학위를 획득했다. 근 30년 가까이 일본어는 물론 관련 학위까지 획득하는 노력을 다 한 결과 상무 승진도 일반적인 코스보다 1년 빠르게 할 수 있었다.

이밖에 손영선 신세계 상무보는 백화점 업계의 ‘고졸 신화’ 주인공이다. 그는 1969년 금란여고를 졸업하고 국제복장학원을 수료한 뒤 신세계 공채로 입사해 임원으로 승진했다. 

김희경 롯데쇼핑 상무보도 신화의 주인공이다. 그는 신경여자상업고등학교을 나온 뒤 롯데쇼핑 백화점에 입사했다. 롯데쇼핑 마트 강변점장, 잡화팀장, 서울역점장 등을 거쳐 2013년 9월부터 롯데쇼핑 롯데마트 대전충청고객부문 부문장을 맡고 있다.

심지어 고졸 아닌 '중졸 신화'도 있다. 김남옥 한화손해보험 전문위원(상무보)이다. 그는 1992년 전업주부이던 한화손보의 전신인 신동아화재에서 보험 영업을 시작했다. 실력을 인정받으며 부산지역본부장 등을 지냈고 지난해 한화손보의 첫 여성 임원으로 발탁됐다.

왼쪽 사진은 윤종규 KB금융지주 회장, 오른쪽은 함영주 KEB하나은행장.

금융계

금융업계는 다른 업계보다 유독 고졸출신 임원이 많은 편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명문 상고 출신들의 입행이 빈번했기 때문에 그들이 임원으로 대거 승진할 수 있었다. 지난해 8월 기준 4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우리·KEB하나)의 임원은 70명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 중 고졸 출신 임원은 총 7명(10%)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뿐만 아니라 고등학교를 졸업 후 바로 입행해 주경야독으로 학위를 따 은행장의 자리에 오른 이들도 있다.

윤종규(63) KB금융그룹 회장과 함영주(62) KEB하나은행장은 대표적인 금융권 고졸 신화를 이룬 인물이다. 윤 회장은 1973년 광주상고를 졸업한 후 고졸 은행원으로 외환은행에 입사했다. 

이후 학업의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1975년 성균관대 야간대학에 입학해 학위를 취득했다. 

윤 회장은 이후 1980년 삼일회계법인으로 자리를 옮겼고 부대표까지 역임했으며 2002년부터는 국민은행 부행장을 맡았다. 

그러면서도 1985년에는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1999년에는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2004년에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평생 일과 학업을 병행해온 노력 덕분에 금융권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지난 21일 하나은행장 연임에 성공한 함영주 KEB하나은행장도 고졸신화의 주인공이다. 그는 강경상고를 졸업 후 1980년 서울은행에 입행했다. 

그 역시 주경야독을 게을리 하지 않아 단국대 회계학과를 야간으로 졸업했다. 서울은행과 하나은행이 통합한 이후에는 하나은행 분당중앙지점장, 충남북지역본부장 등을 역임하며 승진가도를 달렸다. 2013년에는 몸담고 있던 충청영업그룹의 영업실적이 전국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일적인 능력뿐만 아니라 사람을 이끄는 리더십도 탁월했다. 그의 좌우명은 ‘낮은 자세로 섬김과 배려의 마음’일 만큼 아랫사람을 잘 챙기기로 유명하다. 고졸 출신이지만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밑바탕이다.

순수하게 고졸 학력으로만 임원에 오른 이들은 7명이다. 고졸 임원을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은 신한은행(4명)이다. 서현주 부행장은 부산상고를 졸업한 뒤 신한은행 개인고객부장 등을 거쳐 임원이 됐다. 

서춘석 부행장보(ICT그룹)는 덕수상고를 나왔으며 윤상돈 부행장보는 광신상고를 졸업했다. 이명구 상무도 서춘석 부행장과 마찬가지로 덕수상고를 졸업하고 IT총괄부 팀장 등을 거쳐 임원이 됐다.

이밖에 국민·우리·하나은행도 고졸 출신 임원을 1명씩 두고 있다. 이용덕 국민은행 전무(중소기업지원그룹)는 대구상고 졸업 후 임원 자리까지 올랐고 정원재 우리은행 부행장(기업고객본부)은 천안상고를 졸업하고 임원이 됐다. 

또 한준성 하나은행 전무(미래금융그룹)는 선린인터넷고를 졸업한 뒤 신사업추진본부 본부장 등을 거쳐 임원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금융권의 고졸신화도 앞으로는 점차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금융권뿐만이 아니다. 대한민국 산업계 전체가 마찬가지다. 

고학력 시대가되면서 고졸 출신이 점점 홀대받는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마이스터고 출신 등 고졸 출신 채용을 늘린다는 기업이 생겨나고 있긴 하지만 아직은 미미한 수준이다.

은행에서 고졸이 차지하는 비중도 한때는 25%에 육박했지만 지금은 15% 미만으로 떨어진 상태다. 지난해 우리은행은 특성화고 출신 70명을 채용했지만 올해는 40명을 뽑는 데 그쳤다. 

타 은행들의 상황도 이와 비슷하다. 교육부에 따르면 2013년 720명이었던 은행권 고졸 취업자 수는 올해 절반 수준인 400명으로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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