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신문=신상언 기자] 대한민국의 금융 산업은 12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1897년 우리나라 최초의 은행이 설립(한성은행)된 것이 금융 역사의 첫 페이지이다. 국내 금융 산업은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 자본에 의해 설립된 은행이 시장을 장악했다. 해방 이후 1950년 한국은행이 정비된 후 국책과 민간 은행이 잇따라 출범했고, 80년대 호황기를 맞았다. 이후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라는 엄청난 시련을 이겨낸 뒤 질적 성장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국내 금융산업은 무점포시대 개막과 함께 핀테크 등 제2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1897년 설립된 한성은행은 대한민국 최초의 은행이다. 한성은행이 설립되기 약 20년 전인 1878년 제일은행 부산지점이 존재했다. 하지만 우리 자본이 아닌 일본에 의해 설립된 은행이었다. 

한성은행은 김종한, 이보응 등 9명의 발기인에 의해 순수 국내 민간자본으로 세워졌다. 설립 이후 대한제국의 친러 정책으로 휴업을 하기도 했지만 1903년 친일 자본을 끌어들여 다시 문을 열었다.

이후 1918년 도쿄지점, 1922년 오사카지점을 각각 열면서 덩치를 키우다가 1943년 동일은행과 합병하면서 사명을 조흥은행으로 바꿨다. 조흥은행은 2006년 신한은행에 합병됐다. 대한민국 최초의 은행이 이름을 바꿔가며 100년 이상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셈이다.

태동기

한성은행 출범이후 고종 황제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대한천일은행이 설립(1899)됐다. ‘하늘 아래 첫째가는 은행’이 되라는 뜻을 가진 이 은행의 초대 은행장은 농상공부대신을 역임한 민병석이다. 

대한천일은행은 일반은행의 역할뿐만 아니라 황실 및 주요 기관의 재정업무를 담당하는 중앙은행의 역할도 수행했다. 현재 한국은행의 역할과 비슷했다고 볼 수 있다.

중앙은행의 역할을 수행했던 만큼 조선·일본·청나라 등 다양한 고객이 몰렸다. 이후 대한천일은행은 대동과 삼남은행을 흡수 합병하면서 사세를 확장하다가 광복 이후에는 한국상업은행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대한천일은행이 중앙은행의 역할을 일부 담당하긴 했지만 정식 중앙은행으로서 화폐 발권 기능을 가진 은행은 1909년 설립된 한국은행이 최초다. 한국은행은 화폐 발권 기능과 통화량 조절을 통한 물가 안정 기능을 가진 정부로부터 독립된 중앙은행의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한국은행은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 특성상 일본 통감부가 자본금 1000만원으로 세웠다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1911년 한일 강제병합 이후에는 일제가 제정한 조선은행법에 따라 이름을 조선은행으로 바꿔야 했다. 일본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1945년 해방 이후다. 조선은행은 1950년 한국은행법 제정에 따라 원래 이름을 되찾았다.

성장기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금융 산업은 본격적인 성장기를 맞이하게 된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시중은행과 국책은행 대부분이 광복 이후 산업화시기를 거치며 성장하기 시작했다.

1950년대 들어 한국상업은행이 출범했다. 한국상업은행의 전신은 1899년 설립된 대한천일은행이다. 한국상업은행은 출범 이후 1956년 주식을 상장했으며 1972년에는 시중은행 중 최초로 민영화에 성공했다. 

1999년 1월 한일은행과 합병해 한빛은행으로, 한빛은행은 2001년 우리금융지주(주)로 편입돼 우리은행(2002)이 출범하게 된다.

1954년에는 산업의 개발과 국민경제 발전을 위한 산업자금의 공급을 위해 한국산업은행이 설립됐다. 한국산업은행의 전신은 조선식산은행(1918)이다. 

조선식산은행은 조선총독부의 산업 정책을 뒷받침하던 핵심 금융 기관이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와 함께 식민지 경제 지배의 한 축을 담당하기도 했다. 한국산업은행으로 거듭난 이후 1962년 외자도입과 관련한 대내지급보증업무를 시작했다. 

1967년 외국환은행업무, 1989년 신탁업무 등을 시작하면서 산업 금융 발전에 기여했다. 한국산업은행은 2008년 민영화 과정을 거쳐 현재는 KDB산업은행으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1958년에는 농협은행(현 NH농협은행)도 문을 열었다. 농협은행의 시작은 1907년 설립된 ‘금융조합’이다. 이 금융조합을 바탕으로 농협은행이 발족됐으며 1961년 6월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결정으로 농업은행과 농협의 통합이 이뤄진다. 

그해 8월 농업은행과 농협이 통합된 통합농협 발족됐고 이때 농업은행의 도시지역 지점들은 중소기업은행으로 분리 됐다. 농협은행은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교육금고를 관리하는 업무를 맡았으며 1969년에는 상호금융 업무도 개시하면서 농촌 경제의 성장과 대한민국 금융 산업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화폐개혁

금융 산업 성장 초기인 1960년 들어 대한민국은 제2차 화폐개혁(1962)을 단행한다. 앞서 1953년 ‘긴급금융조치법’에 의한 제1차 개혁 이후 격심한 인플레이션 수습과 경제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2차 화폐개혁을 단행한 것이다. 화폐단위는 100:1로 평가 절하되고 ‘환’에서 ‘원’으로 개칭됐다.

해방 후 한국경제는 미국의 무상원조에 기대 국가를 운영 할 만큼 열악한 형편이었다. 50년대 후반 들어 무상 원조가 줄고 유상원조로 바뀌기 시작하자 한국경제는 혼란에 빠지게 됐다. 자급자족적 경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물자가 부족해지면서 인플레이션이 시작됐다. 

이를 억제하고 화폐 시스템을 정비하기 위해 단행된 제2차 화폐개혁은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하지만 60~70년대에 한국경제가 발전을 하기 위한 움직임의 첫 단추로 평가된다.

화폐개혁이 단행되는 혼란 속에서 새로운 은행들이 생겨났다. 1961년 중소기업은행법의 제정을 통해 자본금 2억원 규모로 중소기업은행이 설립된다. 

대한민국 경제계의 기반이 돼야 할 중소기업의 경제활동을 지원하고 성장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다. 중소기업은행은 1965년 외자취급 업무를 시작하고 1975년에는 외국환업무 규정을 제정해 관련 업무를 시작하기에 이른다.

이후 중소기업은행은 1982년 9월 중소기업금융채권을 발행하고 1986년에는 한국기업개발금융을 세우기도 했다. 1988년 신탁업무 취급을 시작했다. 

1994년에는 코스닥에 상장됐으며 2012년 중소기업대출 100조원을 달성하면서 대한민국 중소기업 금융의 대들보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화폐개혁이 단행된 이듬해에는 서민경제의 발전과 향상을 위해 제정된 국민은행법(법률 1201호)이 공포됨에 따라 국민은행(1963년)이 세워졌다. 화폐개혁으로 혼란스러운 60년대 초 정부는 서민금융제도를 확립하고 전담금융기관을 만들고자 국민은행을 출범시킨 것이다.

국민은행은 1987년 국민신용카드를 설립하고 1989년 신탁업무도 시작했다. 1994년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했으며 1955년 국민은행법 폐지로 민영화의 수순을 밟았다. 2001년에는 금융기관 최초로 총 자산 100조원을 넘어서며 말 그대로 국민의 은행으로 자리 잡았다.

제2 금융

1972년 ‘8·3긴급조치(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대통령 긴급명령)’로 대한민국 금융 산업은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정부는 기업에게 사채동결 및 금리인하 조치를 취하고 사금융을 양성화하기 위한 일명 ‘사금융 양성화 3법’을 제정하게 된다. 투자금융회사, 상호신용금고, 신용협동조합법 등을 제정해 제2금융이 양성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당시 제1금융의 제도권 하에 들어갈 여력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불법 사금융 등을 이용하다보니 폐해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제2금융권의 활성화를 통해 대한민국의 금융 시스템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키게 된다.

사금융 양성법으로 인해 1970년대부터 ‘상호신용금고’가 설립되기 시작했다. 상호신용금고는 서민에게 금융 편의를 제공하고 신용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민간 서민금융기관이다. 주업무는 수신업무·여신업무·부대업무로 나뉜다. 

신용도가 다소 낮은 서민들에게 문이 열려있는 만큼 일반 은행보다 이자율이 높았다. 상호신용금고는 2001년 상호신용금고법이 상호저축은행법으로 개정되면서 2002년 상호저축은행으로 명칭을 변경, 2007년부터는 저축은행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신용협동조합도 사금융 양성화법 이후 생겨난 제2금융권이다. 지역·직업·종교 등 상호유대를 가진 개인이나 단체 간의 협동조직을 기반으로 해 자금의 조성과 이용을 도모하는 금융기관이다.

신용협동조합법(1972)의 실시로 마을금고가 설치돼 설립과 출자·대출한도·이자율·예탁금·상환준비금 등에 대한 규제를 받게 됐다. 신용협동조합은 예·적금의 수납, 대출 등의 신용사업, 복지사업, 조합원을 위한 공제사업, 조합원의 경제적·사회적 지위향상을 위한 교육 등의 사업을 수행한다.

보험·증권

1972년 ‘8·3조치’ 이후 제2금융권이 본격적으로 성장하면서 보험·증권업의 성장세도 두드러지게 된다. 1972년 한국화재보험협회가 설립됐고 1978년 한국보험공사 설립과 여의도 증권거래소가 개장하면서 보험·증권 산업 발전의 토대가 마련되기 시작했다. 80년대 3저 호황 덕분에 증권업은 활황기를 맞이하게 된다.

1962년 설립된 대신증권은 80년대 가장 잘 나가던 증권사 중 하나였다. 1962년 삼락증권에서 시작해 1975년 현재의 상호인 대신증권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1980년 국내 증권업계로는 최초로 주문온라인 시스템을 구축했고 1986년 대신개발금융, 1988년 대신투자자문, 1989년 대신생명을 설립하면서 증권업의 활황기를 선도했다. 1997년 국내 증권업계로는 최초로 홈트레이딩 주문시스템(CYBOS DOS 버전)을 개발해 선물옵션 거래를 실시했다. CYBOS는 인터넷 주식 매매 시스템인 홈트레이딩시스템(HTS)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이밖에 대한생명보험(1946), 흥국생명보험(1950), 삼성생명(1957), 대한교육보험(1958) 등 보험업계도 고도의 경제성장률을 보이던 80~90년대 호황기를 거치며 한국 금융 산업에 한 획을 그었다.

1983년 당시 한국은행 본관 전경

금융실명제·IMF

80년대까지 한국의 금융 산업은 고도 성장해왔지만 이면에서는 갖가지 부작용으로 몸살을 앓아야 했다. 금융 거래에 있어서 차명계좌, 불법거래 등 투명성이 보장되지 않아 각종 부정부패나 정경유착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1982년 ‘장영자·이철희 어음사기사건’은 대한민국 금융 산업에 경종을 울리게 된다. 

이후 1983년 ‘7·3조치’로 금융실명제의 실시방법이 공식적으로 거론된 후 1993년 금융실명제가 실시되기에 이른다.

금융실명제를 통해 경제정의를 실천하기 위한 시도가 이어졌지만 그로부터 4년 뒤인 1997년 대한민국은 IMF 외환위기를 겪게 된다. 

당시 동남아에 몰아닥친 외환위기로 환율이 치솟으면서 국내 시중은행들은 자금난을 겪게 된다. 이에 은행들은 기업에 부채 상환을 요구했지만 무리하게 대출을 받았던 수많은 기업이 상환능력을 상실한 채 도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자금을 상환 받지 못한 은행들도 파산하는 도미노현상이 발생했다. IMF 외환위기로 금융 산업은 일대 위기를 맞이한 것이다. 1997년 말 2100여개에 달하던 국내 금융기관의 수는 외환위기를 거치며 10년 후인 2007년에는 1300여개로 반토막 나게 됐다.

정부는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대대적인 공적자금을 투입했다. 공적자금이란 정부가 기업이나 금융기관의 구조조정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한 자금을 일컫는다. 외환위기 당시인 1997년부터 2009년까지 은행에 투입된 공적자금은 약 86조원, 제2금융권에 투입된 자금은 약 79조원에 이른다.

정부는 이후 공적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은행을 매각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2002년 이후 공적자금이 투입된 금융기관들의 수익성·건전성이 회복됐고 정부는 채권 매각을 통한 은행 민영화 등의 방식을 이용해 공적자금을 회수하는데 주력했다. 

이로써 외환위기 이후 정부소유가 됐던 상당수 은행들이 다시 민영화됐다. 12조원 이상의 공적자금이 투입돼 정부소유가 된 우리은행은 지난해 말 정부 소유가 된 지 15년 만에 민영화에 성공하기도 했다. 외환위기로 인한 대한민국 금융 산업의 위기도 이제 조금씩 정상화되는 모양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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