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생산력 발전할수록 불공정 지수 급증
흙수저vs금수저…대선주자도 외면하는 현실


[민주신문=김병건기자] 대략 150여년 전 한 경제학자가 있었습니다. 헨리 조지(Henry George)라고 불리는 선지자 같은 학자입니다. 미리 말씀 드리자면 이 학자가 저술한 ‘진보의 빈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부의 독점이나 불합리에 대해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고, 서구에서는 성경책 다음으로 많이 팔리는 책입니다. 출판된 지 150년이 지났지만, 과거나 지금이나 사회의 화두는 ‘불평등’ 이 아니었나는 생각을 하게합니다.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을 가졌다는 현 대한민국 청년들은 직업을 갖기 힘들고, 천지창조 이래 생산성이 가장 높은 산업 환경, 역사상 가장 효율적인 유통망 속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불평등을 이야기합니다.사회의 생산력은 날로 발전하는데, ‘왜 노동자들은 여전히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가?’, ‘빈익빈 부익부의 근본원인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 물음을 또다시 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회가 지속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헨리는 당시 중국인들의 이민을 반대했던 것으로 더 유명한 사람입니다. 헨리는 반대의 이유로 “값싼 노동력의 유입은 노동임금의 하락과 더불어 지주계층의 소득이 상대적으로 더 많이 늘어난다”는 것이었습니다.

불환빈환불균

‘불환빈환불균(不患貧患不均)’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백성은 가난보다 불공정한 것에 분노한다”는 뜻입니다. 중국 송나라 유학자 육상산의 말로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도 나옵니다.

지난 대선에서 우리 국민들은 ‘적폐(積弊)의 청산’과 ‘경제 민주화’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하지만 돌이켜 무엇이 달라졌는가 생각해보면 실행이 아닌 오직 ‘구호’뿐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구체적으로 볼까요. 2016년 대한민국 중위소득 중 3인 가구의 경우 월358만원이라고 합니다. 중위소득입니다. 그러니까 소득수준 1위부터 맨 마지막까지 줄을 세워서 딱 가운데 있는 사람의 소득입니다.

과연 그런가요. 필자는 중위소득이라는 수치를 처음에는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물론 4인 가구의 경우 월450만원이 훨씬 넘습니다. 주변에 4인 가구 중 월소득 450만원이 넘는 가구는 그리 많지 않은데, 왜 중위소득인가 했습니다.

그러나 몇몇 정부 자료에서 그 이유를 찾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즉 대한민국의 경우 소득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48%을 차지하고 있고, 소득순위 1%는 전체 소득의 약 13%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소위 중위소득이라는 것은 왜곡된 것이라고 봐야 맞을 겁니다. 동국대학교 김낙년 교수의 논문에 의하면 IMF사태가 터지기 직전인 1996년을 대비해 상위 10%의 실질소득은 53.8% 증가했고, 상위 20%는 41.3%가 증가한 반면, 하위 20%의 실질소득은 24.3%가 감소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임금(노동)소득은 해가 지날수록 감소하고, 자본소득은 증가했기 때문이라고 분석되기도 합니다.

개혁의 이중성

지난해부터 정치인들은 ‘흙수저-금수저’를 이야기합니다. 현 대한민국의 자조가 섞인 흙수저-금수저 문제를 해결하려면 출발선상에서 약자가 먼저 출발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과정에서는 사회적 강자와 약자가 공정한 경쟁을 벌일 수 있게 하고, 결과에서 차이가 나면 국가의 합리적 조정으로 격차를 줄여줘야 합니다. 하여 궁극적으로 사회적 계층이동이 가능하고, 가난이 대물림되는 사회를 척결해야 할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잘 산다고 손자까지 출세가 보장되는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법시험 제도가 로스쿨 제도로 변경한 것은 참여정부 시절입니다. 소위 ‘고시 낭인’에 대한 대책이었지요. 그리나 명문 로스쿨의 경우 연간 1억원 학비를 요구합니다. 과연 연간 1억원의 학비를 지불하고 3년간 다닐 수 있는 서민층은 몇 명이나 될까요?

지금 야당의 유력 후보자는 사시준비생들이 기존의 사시제도 일부를 계속 유지해달라고 애원 했지만, 그의 대답은 “요즘 로스쿨에서 장학금을 많이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법시험을 통과하고, 법조인이 되는 길은 분명 계층간 이동입니다. ‘너는 경쟁하고, 경쟁해서 주변의 친구들보다 높은 성적을 받아 장학금을 받아라’라는 이 폭력적인 말은 지금은 당명을 개정한 자유당에서 ‘노동개혁’이라는 말로 포장된 소위 ‘성과 연봉제’와 무엇이 다른지 구분하기는 어렵습니다. 철학적 배경을 따지자면 일란성 쌍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권력 그리고 보위

지난해 미국 대선에서 선풍적인 바람을 일으킨 버니 샌더스의 경우 ‘주당 40시간 일하는 사람이 빈곤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주당 40시간 이상 노동을 하는 ‘완전취업 빈곤층’마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완전취업 빈곤층은 취업 자체가 빈곤 탈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정규직 가구는 부족한 소득을 보전하기 위해 더욱 많은 시간을 일해야 하는데, 이에 따른 가족해체와 삶의 질 황폐화도 심화되는 상황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취업자 수가 2~3명에 이르는데도 불구하고 빈곤층으로 떨어지는 가구가 많다’는 노동사회연구소의 자료는 우리나라에서 완전취업상태에서 빈곤한 사람들이 대략 20%정도라고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최저임금의 인상 논의를 하는 여름이면 수많은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최저임금을 인상하면 기업경영이 어렵다’라고요. 우리나라의 GNP와 비슷한 나라에서 최저임금이 얼마나 낮은지, 그리고 최저임금을 받는 사람의 숫자를 모르고 하는 말일 뿐입니다.

프랑스는 지금 대선이 한참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로봇세(정식법안은 자동화 세금)’를 만든다고 합니다. 기업이 자동화설비를 도입하면 그만큼 노동이 없는 생산성이 향상되고, 이는 기업의 이익을 증가시킬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금을 도입하고, 그 세금으로 기본소득을 지급하자고 합니다.

국가 권력은 이 사회를 지키고 보위(保衛)해야 합니다. 이 사회의 구성원 대다수가 삶의 현장에 매몰되며 빈곤해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사람들은 노동을 하지 않고도 소득이 집중된다면 건강한 사회로 보기에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일하는 사람이 빈곤해서는 안 되고, 노동을 하지 않는 사람이 필요이상으로 부를 축척하는 사회는 우리가 바라는 사회는 결단코 아닐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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