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윗줄부터 시계방향으로 국제차량주식회사의 ‘시발자동차’, 현대자동차의 ‘포니’, ‘쏘나타2’, 대우자동차의 ‘티코’

[민주신문=신상언 기자] 대한민국은 명실상부한 자동차 생산·수출 강국이다.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은 2015년 기준 수출 규모 세계 5위, 무역수지 흑자 규모는 세계 4위를 차지할 만큼 엄청난 생산력과 기술력을 자랑한다. 자동차 산업의 발전 덕분에 한국 경제가 이만큼 성장해올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내 자동차 산업은 62년이라는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눈부신 기술 발전을 거듭해왔다. 경제비사 제11탄은 드럼통을 두드려 만든 국내 최초의 자동차부터 자율주행 전기차까지 세계 유수의 자동차 브랜드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다.

출발

우리나라 최초의 국산 자동차는 1955년 출시된 국제차량제작주식회사의 ‘시발자동차’다. 국내에서 자동차 생산이 처음으로 시작됐다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한글로는 ‘시-바ㄹ’로 표기했다. 시발자동차는 배기량 2도어 4기통 1323cc 엔진에 전진3단, 후진1단 트랜스미션을 얹었다.

성능은 좋지 않았지만 출시 당시 가격은 8만환. 국민 1인당 연평균 소득이 60달러에 불과했기 때문에 일반 국민이라면 약 3년을 모아야 하는 거금이었다.

시발자동차는 미군이 버린 드럼통을 망치로 펴서 자동차 외형을 만들었다. 그리고 미군이 버린 폐기된 차에서 쓸 수 있는 엔진과 부품을 골라내 재생하고. 모자라는 부품은 직접 제작해 만들어냈다. 초기 시발자동차 한 대를 생산하는데 걸린 시간은 최대 4개월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탄생했지만 화제성은 뛰어났다. 전후 복구가 한참 진행되던 상황에서 국내 1호차라는 상징성은 국민들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일종의 자긍심을 키워줬다. 시발자동차가 출시됐던 그 해 10월 열린 산업박람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것도 이 같은 점이 반영됐다는 게 정설이다.

일반 국민이 약 3년을 모아야 하는 거액의 몸값과 최대 4개월이라는 제작 기간에도 불구하고, 시발자동차의 인기는 상당했다. 1955년 출시 이후 1963년 단종까지 무려 3000여대가 판매됐다. 시발자동차는 인기가 높아서 생산이 수요를 늘 못 따라갔다. 시발 투기 붐까지 일어나 상류층 사이에선 ‘시발계’까지 성행해 프리미엄까지 얹어서 전매되는 촌극도 벌어졌다.

한계

시발자동차가 주름잡던 시장에 라이벌이 등장했다. 1962년 새나라자동차가 출시한 ‘새나라자동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 차량은 일본 브랜드 닛산과의 제휴를 통해 ‘닛산 블루버드 P301형’의 부품을 수입해 만든 일명 ‘조립자동차’였다. 새나라자동차 역시 외국 기술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새나라자동차의 인기는 대단했다. 1962년 11월 출시돼 이듬해 5월까지 6개월간 2700여 대 이상 팔려나갔다.

1962년 설립된 ‘새나라자동차’는 신진자동차에 인수된 후 일본 도요타자동차와 기술제휴를 맺게 된다. 이후 1966년 ‘코로나’가 출시됐다. 코로나는 1966년부터 1972년까지 4만4248대가 생산·판매되며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 가격은 83만원대. 신진자동차는 이밖에도 크라운(1967년), 퍼블리카(1967년) 등의 승용차를 생산하면서 1960년대 자동차 산업을 이끌었다. 신진자동차는 일본 도요타 자동차와의 기술 제휴 덕분에 국산화율을 20%까지 끌어올렸다.

승승장구하던 신진자동차에도 위기가 찾아온다. 중국이 주4원칙을 발표한 후 도요타가 한국에서의 철수를 결정(1972년)했기 때문이다. 주4원칙이란 1970년 주은래 당시 중공 수상이 일본의 우호무역대표단과의 각서무역회담을 가진 후 발표한 원칙이다. 골자는 중국은 대만·한국과 거래하거나 미국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는 국가와는 거래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도요타는 중국 진출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국산 자체 기술을 보유하지 못했던 신진자동차는 도요타의 철수와 함께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도약

신진자동차의 몰락 후 자동차 산업은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1967년 설립된 현대자동차는 미국 포드자동차와 합작회사 형태로 사업을 시작했다. 외국 기업과의 제휴나 부품 조립 수준을 넘어선 도약의 발판이 마련된 셈이다.

현대자동차는 1974년 당시 영국 최대 자동차 회사였던 브리티시 레일랜드의 부사장인 조지 턴불을 영입하는 등 기술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같은 노력 끝에 나온 자동차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최초의 국산 자동차 ‘포니(1976년)’다.

당시 포니의 인기는 실로 대단했다. 생산 대수가 50만 대를 넘었으며 캐나다 등 해외로 수출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현대자동차는 엑셀(1985)과 그랜저(1986), 소나타(1988), 갤로퍼(1991) 등을 연속 히트시키며 거대 자동차 기업으로 거듭났다.

경쟁

1970~80년대 들어 외국에 의존해오던 국내 자동차 기술이 조금씩 발전해 가면서 자동차 산업도 호황기를 맞이하게 된다. 현대차를 중심으로 기아·대우·쌍용 등 국내 굴지의 기업들이 기술 경쟁과 자동차 판매에 열을 올렸다.

1944년 설립된 경성정공에서 출발한 기아자동차는 1962년 일본 마쓰다자동차와 기술제휴를 맺으면서 성장하게 된다. 기아자동차는 초창기 ‘딸딸이’라고 불리던 3륜 화물차 K-360을 생산했으며 1974년에는 마쓰다자동차 ‘파밀리아’의 차체를 기본으로 해 국산 최초의 승용차 ‘브리사’를 출시했다.

기아자동차가 본격적인 자동차 산업 경쟁에 뛰어든 당시 전두환 정부는 ‘자동차 산업 합리화 조치’를 내렸다. 차종별로 생산할 수 있는 기업을 구분한 것. 이에 승용차를 생산할 수 없게 된 기아자동차는 틈새시장을 노려 승합차 ‘봉고(1981년)’를 출시하게 된다. 봉고는 출시 이후 오랜 기간 큰 인기를 누렸다. 지금까지도 승합차를 봉고차라고 할 정도로 승합차의 대명사가 됐다. 기아자동차는 일명 ‘봉고 신화’ 덕분에 자동차 업계에서 입지를 다져나갈 수 있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기아자동차는 ‘베스타(1986년)’, ‘프라이드(1987년)’ 등을 출시하면서 국민 자동차기업으로 성장했다. 특히 기아자동차의 대표 승용차 브랜드 ‘프라이드’는 일본의 마쓰다가 설계하고 기아자동차가 생산했으며 미국의 포드가 판매를 담당한 3사 합작 ‘월드카’였다. 외국 기술에 의존해 조립자동차를 만들던 국내 자동차 회사가 이제는 세계의 자동차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프라이드는 2000년 단종 될 때까지 13년간 꾸준한 사랑을 받으며 국민 승용차로 불렸다.

다양성

승용차·승합차가 점유하던 자동차 시장은 1980년대 말부터 SUV·경차 등 다양화되기 시작한다. 1988년 쌍용자동차의 ‘코란도훼미리’, 1993년 ‘무쏘’가 출시되면서 본격적인 SUV 시대가 시작된다. 1974년 지프차 형태로 처음 출시됐던 코란도 시리즈는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쌍용자동차의 전신은 1962년 설립된 하동환자동차공업이다. 설립 초기엔 버스·덤프트럭·고속버스 등 주로 대형차를 생산했다. 1977년 동아자동차로 상호를 변경했으며 1983년 ‘거화’를 인수하면서 4륜구동차 생산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다.

거화는 1988년 사명을 쌍용자동차로 바꾸면서 왜건형 4륜구동차인 ‘코란도훼미리’를 출시한다. 4륜구동차 시장의 강자로 군림한 쌍용자동차는 1991년 독일의 벤츠와 기술 제휴를 맺은 후 1993년 4륜구동차의 대명사로 불리는 ‘무쏘’를 출시, 자동차 업계에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무쏘는 1995년에만 3만 대 이상 판매되며 큰 인기를 구가했다.

1990년대 들어서는 대우자동차도 자동차 시장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1991년 출시된 대우자동차의 ‘티코’는 대한민국에 경차 신드롬을 몰고 왔다. 티코라는 이름은 ‘작고 편리하고 기분 좋은 동료’라는 영어의 앞 글자를 딴 것에서 유래했다. 이름처럼 배기량 800㏄, 차량무게 640㎏, 연비 24.1㎞/ℓ를 자량하는 국민 경차로 사랑받았다. 당시 가격이 400만원도 채 되지 않았고 3만 대 이상 판매되는 기록을 세웠다.

이후 1992년 대우자동차는 GM과의 파트너십을 청산하고 국내 기술과 유통망을 내세운 독자경영에 나서게 된다. 이듬해에는 ‘세계경영’을 선언하고 개도국에 공장을 설립하면서 글로벌 자동차기업으로의 도약을 추진한다. 1994년 씨에로, 1997년 누비라, 1997년 레간자 등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국내 자동차 시장에 돌풍을 일으켰다. 당시 대우자동차는 현대·기아에 버금가는 굴지의 자동차회사로 이름을 날렸다.

도전

자동차 산업이 한국경제 성장 동력이 되면서 삼성도 자동차 산업의 후발주자로 뛰어들게 된다. 삼성그룹은 1995년 삼성자동차를 설립했다. 당시 정부는 자동차 산업 과다 경쟁을 이유로 삼성의 자동차 산업 진출을 반대했었다. 하지만 삼성은 1990년부터 꾸준히 자동차 산업으로의 진출을 모색했고 1995년 정부의 허가를 받고, 자본금 1000억원으로 공식 출범하게 된다.

삼성자동차는 일본 닛산과 기술제휴를 맺고 닛산의 자동차 공장 설비 및 자동차 부품을 수입, 조립 판매해 1998년부터 SM5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또 대형 트럭을 생산하는 ‘삼성상용차’을 통해 야무진 SV110이라는 모델의 1톤 트럭을 생산(1998년)하기도 했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로 한국경제 전반에 위기가 찾아오게 되고 자동차 산업도 직격탄을 맞게 된다. 삼성그룹은 1999년 삼성자동차의 법정관리를 신청하게 된다. 당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사재 2조8000억원을 삼성자동차에 출연하기도 했다.

삼성자동차의 법정관리인인 홍종만 사장은 삼성자동차의 해외 매각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과 결별을 선언했다. 이후 2000년 르노-닛산 얼라이언스가 6200억원에 삼성자동차를 인수하면서 르노삼성자동차가 출범하게 된다. 자동차 산업에 야심차게 뛰어들었던 삼성의 굴욕이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1월3일 개최된 'CES 2017'에서 관람객들이 현대자동차의 ‘VR 시뮬레이터’를 체험하고 있다.

위기와 기회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자동차 산업은 위기를 맞게 된다. 앞서 언급한 삼성자동차뿐만 아니라 기아자동차·쌍용차·대우자동차 등도 사세가 기울기 시작한다. 대우자동차는 1998년 쌍용자동차를 인수하는 등 확장경영에 나서면서 글로벌 자동차그룹으로의 도약을 꿈꿨지만 경영악화에 빠지면서 2000년 11월 최종 부도를 맞았다. 또 이듬해인 2001년에는 과거 사업 파트너였던 GM에 매각되면서 외국계 기업으로 넘어갔다.

대우자동차에 인수됐던 쌍용자동차도 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가는 등 활로를 모색했지만 위기를 타개하지 못하고 2004년 상하이차에 인수됐다. 하지만 이후에도 재무구조가 개선되지 않자 2009년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인도의 마힌드라그룹에 인수됐다. 쌍용차 역시 외국계 기업으로 편입돼 버린 것.

기아자동차는 1997년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1998년 현대자동차에 인수된다. 하지만 기아자동차는 현대·기아차의 출범 이후에도 ‘스포티지’, ‘K시리즈’를 출시하면서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2003년에는 미국 수출 연간 20만 대를 넘어섰으며 2012년에는 브랜드 컨설팅 전문회사 인터브랜드가 발표한 ‘세계 100대 브랜드’에서 87위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현대자동차는 유일하게 IMF 외환위기를 이겨내고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자동차 산업의 선두주자 역할을 하고 있다. 현대·기아차 출범 이후 2000년 경영권 다툼인 일명 ‘형제의 난’을 겪기도 했지만 2005년 글로벌 100대 브랜드에 진입했다. 2011년 초경량 차세대 수소연료전지차 HED-9 ‘인트라도’를 공개하고 소나타 하이브리드를 출시했다. 지난해에는 CES를 통해 자율주행차를 시연하면서 세계 자동차 기술을 선도하는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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