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신문=신상언 기자] 우리나라 제약 산업은 지난 120년간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왔다. 1897년 대한민국 최초의 제약회사라고 평가 받고 있는 ‘동화약방(현 동화약품)’ 설립 이래, 300여개의 제약사가 국민 건강 지킴이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우물 안 개구리라는 지적도 끊이지 않았지만 신약 개발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해 나가고 있다. 경제비사 제10탄은 대한민국 제약 산업의 발전에 관한 이야기다.

동화약방의 ‘활명수’는 우리나라 최초의 양약이다. 19세기 말까지만 하더라도 우리나라는 한의학이 중심이 됐지만 국내 최초의 양약인 ‘활명수’가 출시되면서 일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동화약방은 1897년 민강 선생에 의해 설립됐다. 활명수는 민강 선생의 아버지인 민병호 궁중선전관이 궁중의 비방을 바탕으로 양약 기술을 접목해 만들어낸 구급위장약이다. 

동화약방은 1910년 ‘부채표’라는 상표를 특허국에 등록하면서 본격적인 생산·판매에 나섰다. 이후 1931년 동화약품으로 상호를 바꾸면서 만주국에 ‘부채표 활명수’를 상표출원하기에 이른다.

“답답한 속 한방에”

동화약품은 이후로도 ‘국민 약’으로 불릴 만한 약품들을 여럿 출시했다. 1957년 기침가래 감기약 ‘코후나민 시럽’을 출시했고, 1967년 ‘까스활명수’, 1968년 ‘판콜에이’, 1980년대 들어 덴마크 레오사와의 제휴로 ‘후시딘연고’를 발매했다.

이들 의약품은 지금까지도 국민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지난해 상반기 기준 동화약품의 주요 매출액 비중은 가스활명수큐 17.3%, 후시딘연고 8.3%, 감기약 판콜(에이, 에스) 8.1% 등이다.

특히 동화약품의 대표적인 브랜드인 가스활명수는 1996년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제조회사 및 제약회사, 가장 오래된 등록상표, 최장수 의약품 등 기네스북 4개부문에 등재되는 기록을 세웠다. 

2014년에도 ‘까스활명수-큐’가 KMAC이 주관한 브랜드 파워 소화제부문에서 10년 연속 골든(1위)브랜드에 선정됐다.

동화약품 가스활명수가 시장을 장악한 가운데 라이벌로 등장한 제품이 1989년 종근당에서 출시한 ‘속청’이다. 생약소화제 성분이 함유된 소화제라는 콘셉트를 내세우면서 1990년대 액체소화제 시장에서 10%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하며 인기를 끌었다. 또 미국에도 300만병 이상을 수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지끈지끈 두통엔~”

종근당은 소화제 ‘속청’뿐만 아니라 한 때 ‘국민 두통약’으로 불리던 ‘사리돈’을 제조·판매했다.

종근당의 전신은 1941년 설립된 ‘궁본약방’이다. 창업자 故이종근 회장은 약품 외판원으로 일하면서 1941년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3가(아현동)에 작은 약방을 차렸다. 이후 1956년 사명을 종근당 제약사로 바꾸면서 본격적인 제약기업으로 성장했다.

1949년 국내 최초의 튜브 제품 ‘다이아졸 연고’를 출시했고, 1968년 출시한 어린이용 구충제 ‘비페라카라멜’은 당시 9만 개 이상 팔려나가며 인기를 끌었다. 이후 1983년 스위스 제약사 ‘로슈’와의 기술제휴를 통해 진통제 사리돈을 출시했다. 또 사리돈의 후속 제품으로 순수 국내 기술로 만든 진통제 펜잘을 선보이며 인기를 이어갔다.

당시 국내 진통제 시장은 종근당의 사리돈과 삼진제약의 게보린으로 양분됐다. 1968년 세워진 삼진제약은 1977년 해열진통제 ‘게보린’을 출시하면서 8년 후인 1985년 국내 진통제 시장을 장악하게 된다. 

2001년에는 매출 100억원을 달성했고, 2008년에는 판매량 28억 정을 돌파하기도 했다.

“피로야 물라가라”

‘박카스’도 국내 제약업계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스테디셀러 제품이다. 피로회복제 박카스는 1961년 동아제약에서 알약 형태로 출시된 이후 지금까지 200억 병 이상 판매됐다. 

동아제약의 강신호 회장이 독일 유학 시절 함부르크 시청 지하 홀 입구에서 본 로마신화의 바커스 조각을 보고 아이디어를 내 생산에 이르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술과 담배로부터 간장을 보호한다는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술과 추수의 신 바커스가 이름으로 채택됐다는 후문이다.

박카스는 1962년 20㎖짜리 앰플 형태의 ‘박카스 내복액’이 출시되기도 했으며 이듬해인 1963년에는 비로소 100㎖ 병에 담긴 지금 모습의 드링크제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박카스는 의약품으로 분류돼 용량이 100㎖로 제한됐으며 변질을 막기 위해 진한 갈색 병을 사용하고 있다.

국민 피로회복제답게 1966년 5억5000만원의 매출을 기록한 이래 1967년 약 15억원, 1972년 24억원, 1980년 240억원, 1991년 730억원의 매출을 달성했다. 1994년에는 매출 1000억원을 돌파했다.

박카스를 출시한 동아제약의 전신은 1932년 故강중희 회장이 서울 종로구 종로1길(중학동)에 세운 ‘강중희 상점’이다. 강중희 상점은 당시 의약품과 위생재료 등을 도매로 파는 사업을 했다. 

1949년 사명을 동아제약(주)으로 바꾼 이후 1958년 강중희 회장의 장남인 강신호 회장이 동아제약 상무로 입사하면서 1961년 동아제약을 대표하는 상품인 박카스가 출시됐다.

현재 동아제약은 소비자들이 처방전 없이 살 수 있는 일반의약품, 의약외품 및 건강기능식품 등을 주력 사업 분야로 내세우고 있다. 박카스뿐만 아니라 판피린, 써큐란, 가그린, 모닝케어 등을 생산·판매하고 있다. 

지난 2014년 기준으로 동아제약의 매출액 비중은 박카스가 15%를 차지하며 여전히 기업의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하지만 박카스도 출시 이후 4번의 전쟁을 거쳐야 할 만큼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했다. 첫 번째 전쟁은 '구론산'과의 전쟁이었고 2차는 '토코페롤', 3차는 각종 인삼·버섯음료와의 전쟁이었다. 

4번째는 비타민 음료와의 전쟁이다. 특히 비타민 음료의 대표주자로 떠오른 광동제약의 ‘비타500’은 한때 박카스의 아성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광동제약이 2001년 출시한 비타 500은 사과 35개, 귤 9개, 레몬 7개를 각각 섭취해야 얻을 수 있는 비타민C 500mg을 음료 한 병으로 섭취할 수 있다는 ‘뉴메릭 마케팅’으로 화제를 모았다. 

2004년부터는 북미지역에도 수출되고 있으며 2007년 판매 15억 병, 2008년에는 20억 병을 넘어서면서 제2의 국민 피로회복제로 등극했다. 실제로 2005년 박카스를 제치고 점유율 1위를 차지하기도 했으나 다시 박카스에 1위 자리를 내줬다.

광동제약은 1963년 故최수부 회장이 세운 광동제약사로 시작 1975년 서울신약, 1978년 한이제약, 1981년 개풍양행을 각각 인수하면서 사세를 확장했다. 특히 광동제약에서 1975년 출시한 ‘쌍화탕’은 박카스의 인기에 버금가는 의외약품으로 불리기도 했다.

쌍화탕은 그 명성에 걸맞게 다양한 아류제품들이 쏟아지면서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했다. 1985년 조선무약이 쌍화탕 신제품을 출시하면서 줄곧 쌍화탕 시장에서 선두를 달려왔던 광동제약은 가격을 내리는 작전으로 맞섰다. 

이때부터 두 회사가 쌍화탕 가격을 계속 인하하는 이른바 ‘쌍화탕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후 1997년 조선무약의 부도로 기나긴 쌍화탕 전쟁도 막을 내리게 된다.

“영양? 한 알이면 충분”

1960년대부터 출시되기 시작한 영양제도 국민 건강을 책임지는 효자노릇을 해왔다. 1961년 출시된 대웅제약의 ‘우루사’는 1976년 국내 간장약 시장에서 점유율 50%를 넘기면서 국내 대표 영양제로 사랑받아 왔다.

우루사는 웅담 성분을 가루로 낸 뒤 이를 압축해 알약으로 만든 제품이다. 웅담의 약효성분인 우루소데옥시콜린(UDCA)이 간에 쌓이는 피로물질을 밖으로 내보내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큰 인기를 끌었다. 우루사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신약이었다. 

당시의 제약들은 쓰고 목 넘김도 부드럽지 못한 게 대부분이었지만 우루사는 목 넘김이 부드러운 연질 캡슐로 출시돼 히트를 쳤다.

1980년에는 매출 100억원을 돌파했고 이듬해에는 국내 의약품 판매부문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우루사는 2013년 ‘대기업 CEO들이 가장 선호하는 영양제’ 부문에서 2년 연속 1위를 차지하면서 여전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우루사를 개발한 대웅제약의 모태는 1945년 설립된 조선간유제약공업사다. 조선간유제약공업사는 1961년 사명을 대한비타민산업으로 바꾼다. 이후 경영난에 빠지게 되면서 윤영환 현 대웅제약 명예회장이 회사를 인수(1966년)하게 된다. 

윤 전 회장은 우루사를 히트시키면서 1974년 대웅제약을 증권거래소에 상장시켰으며 1988년에는 소화제 ‘베아제’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우루사뿐만 아니라 1963년 출시된 유한양행의 ‘삐콤씨’도 국민 영양제로 사랑받았다. 출시 당시 ‘삐콤정’이라는 이름으로 선보였지만 1987년 성분을 보강해 지금의 이름으로 재출시됐다. 

삐콤씨는 유한양행의 창업주인 故유일한 박사가 전쟁 후 영양부족으로 고통 받는 국민들을 위해 개발했다. 당시 국민들은 영양이 부족해 비타민B의 결핍으로 인해 나타나는 펠라그라, 각기병, 구루병 등을 앓기도 했다. 삐콤씨는 출시 이후 10년 만에 매출액 1200% 급증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국민 영양제로 자리 잡았다.

삐콤씨를 개발·판매한 유한양행은 1926년 설립됐다. 설립 초기에는 결핵약, 염색약 등을 미국에서 수입해 팔았지만 한국전쟁 이후인 1957년에는 미국 사이나미드사와 기술 협약을 통해 국내 최초로 항생물질 제품을 만들어 판매했다.

유한양행이 출시한 대표적 의약품으로는 ‘삐콤씨’, ‘안티푸라민’ 등이 있다. 가정상비약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안티푸라민은 1933년 유한양행이 자체 개발한 제1호 의약품이다.

삐콤씨와 동일한 해에 출시된 일동제약의 ‘아로나민’도 국민 영양제로 불릴 만한 인기를 누렸다. 출시 이후 54년 동안 총 80억 정 이상 판매됐다. 국민 1인당 160정씩 복용한 셈이다. 특히 삐콤씨와 아로나민은 50년 이상 종합비타민 영양제 시장의 라이벌로 경쟁해왔다. 아로나민은 2015년 기준 일반의약품 매출 1위를 기록하며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아로나민을 출시한 일동제약의 전신은 1941년 설립된 극동제약이다. 이듬해 사명을 일동제약으로 바꾸고 1959년 국내 최초의 유산균 영양제 ‘비오비타’, 1963년 아로나민을 출시하며 사세를 확장했다. 

일동제약은 2000년 세팔로스포린 항생제 IDC7181이 미국 물질특허를, 10월 세계 최초 개발한 유전자조작 에리스로포이에틴(EPO) 생산세포주가 국내특허를 각각 취득하는 성과를 보이기도 했다.

복제약 명과 암

제약업계는 그동안 수많은 인기 약품들을 생산·판매해왔지만 아직 세계적 수준의 제약 기술을 갖추진 못하고 있다. 1897년 처음으로 제약회사가 생긴 이후 100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지만 자체 개발한 신약은 27개에 불과하다.

더구나 1990년대 들어 국내 제약업계는 연구개발(R&D) 투자를 통한 기술 개발보다는 복제약(제네릭), 바이오시밀러 등에 치중하고 있다. 적은 돈으로 많은 돈을 버는 방법은 될 수 있으나 제약 산업 발전과는 다소 거리가 먼 행보다. 

지난해 국내 제약업계는 R&D 예산 비중을 18% 이상 늘리면서 산업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해외 유명 업체들에 비하면 아직 갈 길이 먼 실정이다.

1973년 설립된 한미약품의 주력 사업은 병원 처방전에 사용되는 전문의약품 분야의 개량신약과 제네릭(복제약) 분야다. 제네릭이란 특허가 만료된 오리지널 의약품을 복제한 제품을 말한다.

한미약품의 주요 제품으로는 고혈압치료제 ‘아모디핀’, 복합고혈압치료제 ‘아모잘탄’, 발기부전치료제 ‘팔팔’, 역류성식도염치료제 ‘에소메졸’, 정장제 ‘메디락’ 등이 있다. 이 중 아모잘탄 제품의 매출 비중이 가장 크다.

또 1991년 설립된 셀트리온의 주력 사업도 바이오시밀러, 항체 신약 개발 사업 등이다. 셀트리온은 2012년 국내 최초의 관절염 치료용 항체 바이오시밀러(바이오의약품 복제약)인 '램시마'를 출시, 식품의약안전처(MFDS)로부터 제품허가를 획득했다. 

'램시마'는 2013년 8월 말 유럽의약품청(EMA) 승인을 받은 후, 67개국에서 판매되고 있다. 2014년에는 항암 항체 바이오시밀러인 '허쥬마'도 식품의약안전처(MFDS)로부터 제품허가를 획득해 시판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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