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뭘 해도 어머니 은혜 못 갚아”
# NFL MVP 하인스 워드, 이민자의 희망으로 우뚝
# 한때 피부색이 다른 한국인 어머니 부끄러워하기도

어머니를 부끄러워하던 8살 소년이 있었다. 어머니의 피부색이 자신과 다른 것도 싫었고, 영어를 못하는 어머니가 숙제를 도와주지 못하는 것도 불만이었다. 그러나 올해 30살이 이 소년은 어머니 이야기만 나오면 “내 성공의 모든 것은 어머니 덕분”이라고 한다.
지난 6일 미프로풋볼리그(NFL) 결승전인 수퍼볼에서 우승 트로피와 함께 최우수선수(MVP)를 거머쥔 한국계 혼혈인 하인스 워드(피츠버그 스틸러스)의 이야기다.

하인스 워드는 1976년 3월8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주한 미군이던 흑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김영희(55)씨 사이에서 출생한 그는 5개월 만에 미국으로 건너간다. 당시 한국의 분위기는 유색인종과 함께 사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물론 한국은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인종차별이 심한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유색인종에 대해서는 배타적이다. 워드가 태어날 당시 한국 사회의 유색인종 배타 분위기는 더욱 심했다. 이 때문에 영어도 서툰 워드의 어머니는 아버지를 위해 한국을 떴다.

그러나 아버지가 결혼 14개월만에 어머니를 버리고 떠나면서 워드 모자의 험한 삶은 시작됐다. 워드는 영어를 할 줄 몰라 양육권을 얻지 못한 어머니 품을 떠나 루이지애나주의 할아버지에게 보내진다.

모자는 워드가 8살이 되는 해 죠지아주 애틀랜타의 작은 마을에 어렵게 정착했다. 어머니는 생존을 위해 하루에 세 가지 일을 했다. 접시를 닦고, 호텔 청소를 하고, 잡화점 계산대에서 일했다.

당시 어머니가 받았던 급료는 시간당 4달러 25센트. 어머니는 16시간씩 닥치는 대로 일했다. 워드는 “NFL에 진출한 뒤 흔들리던 나를 지탱해 준 건 어머니의 일하는 모습”이라고 말한다.

저녁에 일하러 나가는 어머니가 한국식으로 밥을 해놓고 랩을 씌워놓으면 학교에서 돌아온 워드가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었다.
한국을 떠난 뒤 아직 한번도 한국땅을 밟아보지 못한 워드를 어머니는 한국식으로 키웠다. 워드는 “집에 돌아오면 한국식으로 신발을 벗으라고 했다”며 “한국 문화에 집착하는 어머니가 당시에는 싫었다”고 말했다.

워드는 어머니가 원망스러울 때도 많았다. 흑인 친구들끼리 놀다가 어머니가 오면 도망가기 일쑤였다. “한국계라고 놀림 받는 게 제일 싫었다”는 워드는 어느 날 어머니가 차로 학교에 데려다 주는데 친구들이 손가락질하는 것을 봤다. 워드는 재빨리 차 시트 아래도 몸을 숨겼고, 친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차에서 내렸다. 이때 그가 본 것은 눈물을 글썽이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당시 워드는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어머니를 부끄러워했던 깊이 반성한다고 한다. 어머니는 하루에 몇 시간 밖에 자지 못했지만 언제나 워드에게 깨끗한 옷을 입혔고, 풍족한 용돈을 줬다. 워드는 “어머니는 한번도 자신을 위해 돈을 써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후 워드는 놀림을 받아도 “그래 나는 한국인이다. 그게 내 인생이다”는 마음을 먹게 됐다고 한다. 지금 워드의 오른쪽 어깨에는 한글로 ‘하인스 워드’란 문신이 새겨져 있다.

포레스트파크 고교 시절, 워드는 미식축구는 물론 야구에서도 탁월한 솜씨를 뽐냈다. 미식축구에선 쿼터백을 포함해 모든 공격 위치를 소화했고, 야구에선 1번 타자로 뛰며 타율 4할에 도루 35개를 기록는 성적을 올렸다. 40야드(36.6M)를 4.47초에 주파하는 빠른 발은 그의 주 무기중 하나였다.

그는 고교 졸업 무렵 메이저리그 플로리다 말린스로부터 계약금 2만5000달러의 제안을 받았다. 워드는 망설였다. 그 돈이면 어머니의 고생을 조금 덜어드릴 수 있었다. 그러나 워드는 “학업은 계속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대학 진학을 선택했다. 대신 애틀랜타 집에서 차로 1시간 거리인 죠지아 대학을 택했다. 어머니를 홀로 두기 싫어서였다.

대학 미식축구팀에서도 그는 쿼터백, 러닝백, 와이드리시버를 모두 소화하는 만능 공격수로 통했다. 고교 시절 주로 쿼터백으로 활약했지만, 대학 1∼2학년 때는 주전 러닝백의 부상 공백을 메웠으며 빠른 발 덕분에 와이드리시버로도 뛰었다.

특히 워드는 대학 마지막 경기서 쿼터백으로 출전했으면, 리시빙, 러싱, 패싱 공격 3부분에 걸쳐 모두 1000야드를 돌파하는 전인미답의 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팀 승리를 위해 와이드리시버로 경기를 마쳤으며, 감독은 “워드는 희생을 아는 선수”라고 평했다.

“공부하라”, “늘 겸손하라”는 끊임없는 어머니의 채찍질 덕분에 워드는 체육특기자인 데도 학업 우등생이었다.
98년 스틸러스 유니폼을 입은 그는 잘 웃기로 유명한 선수다. 팀 동료는 “언젠가 강한 태클에 걸린 워드의 입에서 치아보호대가 튀어나갔는데도 웃고 있었다”며 언제나 긍정적인 워드의 모습을 전했다.

미국의 한 스포츠전문지는 “워드를 울리려면 어머니 이야기만 꺼내면 된다”고 썼다. 실제 그는 지난 1일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도 “저는 어머니에게 신뢰의 가치, 정직,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을 배웠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워드는 또 다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제 선수생활은 어머니의 인생과 비슷하다”며 “처음에는 맘대로 안되지만 꾸준히 노력하면 결국엔 잘 풀린다”고 했다. 어머니 김영희씨는 한 스포츠채널과의 인터뷰에서 “아들에게 늘 하는 이야기는 한 가지다. 겸손하라(Be humble)고 한다”고 말했다.

2005년까지 4년 연속 1,000야드 전진과 프로볼 진출을 한 워드는 지난해 9월 피츠버그와 계약금 및 연봉 등 총액 2583만달러에 4년간 재계약했다.
“나는 뭘 하더라도 어머니가 베푼 은혜를 갚을 수 없다”고 말하는 워드. 그는 오는 4월 어머니와 함께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김민경 기자 flymink@iminju.net


- 한국과 약속 지킨 하인스 워드

미국프로풋볼(NFL) 슈퍼볼 최우수선수(MVP) 로 뽑힌 하인스 워드(30.피츠버그 스틸러스)는 며칠 전 미 전국일간지 USA 투데이와 인터뷰에서 “나는 절반이 한국인인 만큼 한인 공동체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지난 2일 슈퍼볼 미디어데이에서도 국내 SBS 방송과 인터뷰에서 “한국을 위해 꼭 이기겠다”는 약속을 전했다. 워드는 리시브 두 개로 약속을 지켰다.
결정적으로 터치다운을 돕는 리시브와 터치다운 리시브 1개씩을 성공시킨 것이다.
0-3으로 뒤지던 2쿼터 시애틀 시호크스 엔드라인 3야드 앞에서 쿼터백 벤 로슬리버거의 패스를 받아 역전 터치다운의 발판을 놓았다.
14-10으로 쫓기던 4쿼터에는 동료 와이드리시버 앤트완 랜들 엘의 43야드짜리 패스를 잡아 승부의 쐐기를 박는 터치다운을 찍고 포효했다.
특히 이 터치다운은 쿼터백이 아닌 리시버가 뿌린 패스를 리시버가 잡아 상대의 허를 찌르는 변칙 공격으로 슈퍼볼 역사에 명장면으로 남을 플레이로 평가된다.
워드의 이날 성적은 리시브 5개에 123야드 전진.
MVP가 로슬리버거(23)처럼 백인 쿼터백이었으면 더 좋아할 사람들도 많았겠지만 이 날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충분히 알려주는 기록이었다.
워드는 경기가 끝난 뒤 “동료들이 기회를 줬고 나는 뛰기만 했을 뿐”이라며 “공격 코치와 리시버 코치에게 고맙다”며 소문대로 겸손을 보였다.
어머니가 늘 겸손하라고 귀가 닳도록 얘기한 탓에 남들처럼 요란한 터치다운 세리머니도 잘 하지 않는 워드는 자신을 MVP로 만들어준 플레이를 두고도 동료를 미리 챙겼다.
워드는 “앤트완의 패스가 정말 좋았다”며 “앤트완은 작년 클리블랜드 브라운스 경기(11월15일)에서도 나에게 똑같이 패스한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경>



- 워드 어머니 김영희씨 워드를 만들어낸 작은거인
# 한국보다 한국적인 분위기 만들어 한국적 으로 아들 키워

미식축구 슈퍼볼의 MVP에 오른 한국계 하인스 워드의 어머니 김영희씨(59). 김씨는 애틀랜타 근교 맥도너 자택에서 국내 언론사들과 가진 공동인터뷰에서 “30년 동안 한국을 한 번도 방문하지 못한 아들은 그동안 한국에 함께 가자고 계속 재촉해왔지만 내가 선뜻 응하지 않아 방한이 늦춰져왔다”며 “정확한 일정이 잡히진 않았지만 곧 한국에 가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김씨는 또 아들이 한국 음식을 아주 좋아하고 붓글씨 액자와 한국 공예품 등을 인터넷으로 주문해 집안을 꾸며놓을 정도로 한국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다고 설명했다.
김씨의 자택에는 워드 선수가 인터넷을 통해 한국에서 직접 주문했다는 ‘壽’ ‘安’ ‘和’ ‘盛’이란 한자 아래 ‘peace’, ‘prosperity’ 등의 영어 설명이 붓글씨로 함께 쓰인 액자와 ‘傳家禮樂’이라고 쓴 족자가 걸려 있었다.
또 워드 선수가 주문했다는 종이로 접은 색동저고리와 기러기 목각, 소형 문갑, 도자기 등이 곳곳에 진열돼 있어 여느 한국 가정보다도 훨씬 더 한국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김씨는 아들이 “어렸을 때 시간이 없어 자주 만들어준 수제비를 좋아해 지금도 한 번에 두 대접은 먹어야 한다”며 “미역국을 빼고는 한국음식을 다 좋아한다”고 전했다.
김씨는 요즘에도 아들 생일이면 갈비를 만들어준다고 한다. “우리 애는 깍두기를 특히 좋아하고, 콩나물과 어묵무침 없는 음식은 1류로 치지 않는다”고 전했다. 그러나 김씨는 한국에 대한 좋은 기억보다는 안 좋은 기억이 많아 선뜻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지난 1998년 국내 모 방송사의 초청으로 이뤄진 방한 당시의 나쁜 기억이 있었음을 설명했다.
김씨는 “나는 평생을 강하게 살아왔다. 미국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며 “아들 수입이 크지만 돈을 많이 벌면 또 그만큼 쓰기 마련이다”고 절약정신을 강조했다.
김씨는 아들 일정이 너무 바빠 지난해 추수감사절 이후 얼굴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미국 방송 출연을 위해 뉴욕에 머물고 있는 아들이 김씨는 빨리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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