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신문=신상언 기자] 소주 5000원 시대가 열렸다. 치솟는 생활물가에 주류 값은 물론 빈병 보조금까지 인상되면서 급기야 소주를 5000원에 파는 가게들이 생겨났다. 1000원짜리 한 장이면 시름을 달래주던 서민의 술이 시대를 타고 격변하고 있는 모양새다. 소주와 함께 맥주, 막걸리 등도 서민들과 함께 발전해왔다. 술의 역사가 곧 한국인의 현대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제비사 제9탄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술의 역사와 주류기업의 비사에 관한 이야기다.

대한민국의 소주는 고려시대 몽골에서 전래됐다. 몽골의 전통 증류주가 고려에 유입돼 소주로 발전했다. 현대사에서 정식 제품으로 출시된 최초의 소주는 진로의 ‘진로소주’다.

진로의 전신은 1924년 세워진 진천양조상회다. 故장학엽 창업주는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진천양조상회를 세우고 1924년 ‘진로’라는 이름의 소주를 생산·판매했다. 이후 6.25한국전쟁 당시 월남한 장 회장은 1954년 서울 영등포구에 정착해 소주 생산을 다시 시작했다. 이후 소주는 서민의 술로 자리를 잡게 된다. 두꺼비가 그려진 소주가 판매된 것도 이때부터다.

소주가 서민의 술로써 큰 인기를 끌자 다양한 브랜드가 출시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진로의 아성을 무너뜨리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 중 유일하게 목포에서 판매되다 서울로 진출한 ‘삼학소주’가 진로의 경쟁상대로 부상하기도 했다.

친구

삼학양조에서 출시한 삼학소주는 대한민국 최초의 희석식 소주였다. 목포의 지역 소주로 출발했지만 서울로 상경해 1957년부터 진로와 본격적인 경쟁을 벌였다. 삼학소주도 진로소주 못지않게 1960~70년대 소주시장을 평정한 브랜드다.

삼학소주를 생산하던 삼학양조의 전신은 1948년 전남 목포에 설립된 목포양조로부터 출발한다. 목포양조는 故차남진, 故김철진, 故김문옥씨 등 3명이 창립한 주조회사다. 이후 가수 남진의 이모부인 故김상두씨가 인수해 상호를 삼학양조로 변경했다. 1960년대 양곡관리법 시행으로 곡물주정을 주원료로 한 증류식 소주를 개발해 서민의 대표 술로 자리 잡았다.

양곡관리법이란 정부가 1965년 식량 확보 차원에서 곡물로 소주를 만드는 증류식(쌀이나 보리 등 곡물을 증류시켜 술을 빚던 방식) 소주를 금지한 것을 말한다. 이에 따라 진로도 소주 생산방식을 증류식이 아닌 희석식(고구마, 조 등으로 만든 주정에 물과 첨가물을 넣어 만드는 방식)으로 바꿨지만 일찌감치 희석식 소주를 생산했던 삼학소주가 시대의 바람을 타고 점유율 1위를 차지하게 된다.

승승장구하던 삼학소주에게도 위기가 찾아오게 된다. 70년대 들어 삼학소주는 소주에 메틸알코올이 함유됐다는 의혹을 받게 된다. 이에 당국이 조사에 들어가면서 1971년 일명 ‘납세증지 위조사건’이 발생한다.

납세증지 위조사건이란 삼학이 소줏병에 붙이는 납세증지를 위조해 수억원대의 세금을 포탈했다는 혐의로 조사를 받은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1967년까지 한국 100대 기업 중 61위에 올랐던 대단했던 위세가 꺾이게 된다. 삼학은 사장이 구속되고 주세·법인세 등 1억4000만원을 체납해 1973년 주조시설까지 공매 처분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당시 시대 상황을 살펴보면 석연치 않은 구석도 있다. 1971년은 목포 출신인 김대중 후보가 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와 맞서 아쉽게 고배를 마신 후유증이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 이에 삼학이 김대중 후보의 자금줄 노릇을 했다는 괘씸죄에 걸려 세무조사를 받았다는 풍문이 나돌기도 했다.

경쟁

납세증지 위조사건으로 삼학이 사라진 후 진로의 독주는 한동안 계속됐다. 1973년 정부는 지방 소주 업체 육성을 위해 1도 1사 규정을 신설한다. 이에 250여개에 달하던 소주 업체가 11개로 축소됐다.

1976년에는 주류 도매상들이 사들이는 소주의 50% 이상을 자기 지역 소주회사에서 사도록 하는 '자도주 의무구입제도'가 시행됐다. 이후 강원도에서는 경월소주, 경북에서는 금복주, 울산에서는 무학소주, 부산에서는 선소주, 광주에서는 보해소주가 인기를 끌게 된다.

이 규정은 1996년 헌재에서 위헌 결정이 내려져 폐지됐으나 이후로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대표 소주의 명맥은 이어지게 된다. 경월소주는 롯데주류의 처음처럼으로 이어지게 됐고, 금복주는 참소주, 무학소주는 화이트와 좋은데이, 보해소주는 잎새주로 변경돼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소주 춘추전국시대의 판도가 변한 건 1993년 두산이 경월소주를 인수하면서부터다. 1993년 11월 두산은 강원지역 대표 소주인 경월소주를 인수해 그린소주를 출시했다. 당시 푸른색 계열이던 병 색깔을 녹색으로 바꾸고 대관령 청정수를 사용했다는 점을 어필해 7개월 만에 1억병 판매를 돌파하기도 했다. 수도권 점유율은 30%에 육박했다.

수도권에서 진로의 진로소주와 두산의 그린소주가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진로가 위기를 맞게 된다. 진로그룹은 1997년 무리한 계열사 확장 등의 여파로 경영난에 빠지게 된다. 당시 진로는 소주 외에 전선 제조, 건설, 운송, 백화점, 신용금고, 화장품, 유통업, 광고업 등에 진출했다.

설상가상 노태우·전두환 비자금 사건 때 돈을 제공한 혐의를 받아 그룹에 심각한 타격을 입고 결국 부도처리 됐다. 이후 진로그룹은 골드만삭스에 인수되고 장진호 전 회장은 900여억원을 횡렴한 혐의로 기소돼 도피 중 사망했다.

그 와중에 진로의 ‘참이슬’이 출시된다. 1998년 10월 ‘참진이슬로’라는 브랜드로 출시된 지금의 ‘참이슬’은 23도였다. 원수를 대나무 숯으로 네 번 걸러 사용하며 100% 천연원료와 100% 천연첨가물을 사용해 숙취유발 원인물질을 제거하고 깨끗한 맛을 더욱 강화한 게 특징이다. 참이슬은 출시 이후 지금까지 전국적으로 점유율 1위를 기록하는 등 공전의 히트를 이어가고 있다.

두산의 그린소주도 2006년 2월 ‘처음처럼’으로 브랜드를 변경하고 참이슬의 진격에 맞섰다. 19도의 낮고 순한 소주를 특징으로 내세운 처음처럼은 두산주류에서 출시되다 2009년 롯데칠성음료에 인수됐다. 처음처럼과 참이슬은 점유율 1, 2위를 다투며 대한민국 소주시장의 양대 산맥으로 군림하고 있다.

양강

대한민국 최초의 맥주회사는 일제시대 때 설립됐다. 하이트의 전신인 조선맥주는 1938년 설립됐다. 조선맥주의 당시 주류공장은 경기도 시흥군에 위치해 있었는데 일본 맥주회사인 ‘대일본맥주’의 계열사로 분류돼 있었으며 자본과 기술 모두 일본으로부터 들여왔다. 또 오비맥주의 전신인 쇼와기린맥주주식회사도 일제시대인 1933년 설립됐다.

해방 이후 미군정에 의한 적산관리체제를 거쳐 맥주공장이 민간에 불하됐다. 민간으로 넘어간 조선맥주는 상호를 유지한 채 ‘크라운맥주’를 생산했고, 쇼와기린맥주는 동양맥주(현 오비맥주)로 이름을 바꿨다.

1960년대 맥주시장은 오비의 독주체제였다. 1965년 생산라인에 외국설비를 도입하는 등 투자를 아끼지 않았고 맥주시장 점유율 60%를 돌파했다. 조선맥주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1962년 국내 최초로 해외수출을 하는가 하면 73년 기업공개에 이어 78년 마산공장 증설, 89년 전주공장을 준공하면서 세를 확장해 나갔다.

1975년에는 양대 맥주제조사 이외에도 한독맥주의 ‘이젠백맥주’가 출시되기도 했다. 독일의 맥주회사인 이젠백이 섬유회사인 삼기물산과 손잡고 한독맥주를 설립한 것이다. 한독맥주는 양사의 경쟁체제 속에서도 15%의 점유율을 기록하는 등 제3의 맥주로서 널리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맥주와 동양맥주의 치열한 경쟁 구도 속에서의 생존과 자금력 부족 등의 이유로 1976년 부도를 내고 말았다. 이후 1977년 한독맥주는 조선맥주에 인수됐다.

각 지역을 대표하는 소주.

페놀

승승장구하던 오비맥주는 90년대 들어 위기가 찾아왔다. 1991년 일명 낙동강페놀오염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1991년 3월14일 경북 구미에 위치한 두산전자의 페놀원액 저장 탱크에서 30톤의 페놀원액이 상수원으로 유출된 사건이다. 낙동강으로 흘러들어간 페놀 때문에 밀양, 함안은 물론 영남 전 지역이 페놀 파동으로 몸살을 앓았다.

이 사건으로 환경청 공무원은 물론 두산전자 관계자가 구속되는 등 문책인사가 잇따랐고, 시민들은 두산 제품 불매운동을 벌였다. 이에 두산의 계열사였던 오비맥주가 직격탄을 맞았다. 수질 오염에 관한 사건이라 물을 다루는 주류 업체로서는 헤어 나올 수 없는 타격을 입게 된 것이다. 두산그룹의 오비맥주는 페놀 사건 여파로 1998년 벨기에 인터브루로 매각됐다.

낙동강 페놀 사건 파동으로 맥주시장에서 다시 조선맥주가 부상하게 된다. 조선맥주는 1993년 하이트맥주를 출시했다. 당시는 낙동강 페놀 사건으로 국민들의 수질 안전에 대한 심각성이 극에 달해있던 때였다. 조선맥주는 이 틈을 타 150m 아래 깨끗한 지하수로 만든 하이트 맥주라는 콘셉트로 소비자를 공략했다. 이에 1996년 맥주업계 1위를 탈환하고 조선맥주주식회사는 1998년 3월 사명을 하이트맥주주식회사로 변경했다.

이후 하이트맥주는 승승장구해 2002년 하이트맥주의 누적판매량이 100억병을 돌파했다. 2005년에는 진로와 합병을 거쳐 하이트진로가 출범했다. 1994년 당시 진로가 출시한 카스맥주와 함께 하이트맥주, 2006년에는 맥스를 출시하면서 오비맥주와 함께 맥주시장의 강자로 군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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