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신문=신상언 기자] 현대 사회는 ‘다이어트’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제 성장으로 여유가 생기고 먹을거리가 넘쳐나니 ‘먹는 일’보다 ‘굶는 일’이 더 어려워졌다. 6.25 한국전쟁과 1960~70년대 보릿고개를 생각하면 비약적인 발전을 한 셈이다. 서민들의 허기진 배를 달래주던 라면과 하루의 고단함을 눈 녹듯 사라지게 해준 달콤한 빵과 아이스크림. 과자 한 봉지에도 웃음 지을 수 있었던 그 시절이 때로는 그립다. 경제비사 8탄은 국민과 함께 성장해 온 식품기업에 관한 이야기다.

1968년 당시 삼양식품이 베트남과 삼양라면 360만포 수출계약을 맺는 모습.

국민 라면

라면은 1960년대 이후부터 우리 국민들의 배를 채워준 효자식품이다. 대한민국은 6.25 한국전쟁 이후 엄청난 식량난에 시달려야 했다. 폐허가 된 국토는 주식인 쌀 생산량 급감을 불러왔고, 전후 20여년간 배고픔은 계속됐다.

대한민국 최초의 라면은 1963년 출시된 삼양식품의 ‘삼양라면’이다. 닭고기 스프로 맛을 냈으며 주황색 포장지가 특징이었다. 삼양라면의 당시 가격은 중량 100g짜리 한 봉지에 10원.

故전중윤 삼양식품 회장은 국민들이 간단하고 쉽게 먹을 수 있는 식품을 공급하려는 취지로 일본에서 라면 기계 2대를 들여왔다. 이후 개발 과정을 거쳐 1963년 최초의 라면이 탄생했다.

삼양라면을 탄생시킨 삼양식품의 전신은 1961년 설립된 삼양제유주식회사다. 전 회장은 남대문시장을 지나다가 꿀꿀이죽을 먹는 사람들을 보고 대한민국의 식량난을 해결하는 데 기여하고자 회사를 세웠다. 그 의도대로 삼양라면은 국민들의 배고픔을 달래주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삼양라면은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0원짜리 라면 하나는 한 끼 식사로도 손색이 없었다. 1969년에는 업계 최초로 베트남에 라면을 수출해 국익에도 기여했다. 1972년에는 국내 최초로 컵라면을 생산하기에 이른다.

승승장구하던 삼양식품은 1989년 ‘우지 파동’으로 시련을 겪게 된다. 라면을 만드는 과정에서 식용이 아닌 공업용 소기름을 사용했다는 언론 보도가 쏟아져 나오면서 위기에 직면했다. 이후 1997년 무죄 판결을 받으며 혐의를 벗었지만 라면 시장의 주도권은 ‘농심’으로 넘어간 후였다.

삼양라면은 국민 라면 타이틀을 농심 ‘신(辛)라면’에 내줬다. 농심 신라면은 최근 30년 이상 점유율 1위, 판매율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농심의 전신은 1965년 신춘호 회장이 설립한 롯데공업(주)이다. 신춘호 회장은 신격호 전 롯데그룹 회장의 동생이다. 롯데공업이 처음으로 만든 라면은 ‘롯데라면(1965년)’이었다.

이후 롯데공업은 ‘왈순마(1968년)’ 라면을 출시했다. 왈순마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한국군에 납품되기도 했다. 롯데공업은 1978년 사명을 농심으로 변경하고 1982년 너구리와 육개장 사발면, 1983년 안성탕면, 1984년에는 짜파게티를 잇따라 출시해 히트시켰다.

1986년에는 국민 라면의 대명사 신라면을 출시·판매하기 시작했다. 농심은 아시안게임(1986년)과 서울올림픽(1988년)의 공식 라면 공급업체로 지정되면서 세계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1996년에는 중국 상하이, 2000년 중국 선양, 2005년 미국 LA지역에 라면공장을 준공하고 수출에 박차를 가했다. 먹을거리가 부족해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나라에서 세계적인 식품 수출 기업이 탄생한 것이다.

오뚜기도 국내 라면 시장의 강자다. 1987년 출시된 오뚜기 진라면도 30년간 사랑받아온 국민 라면이다. 진라면의 원래 이름은 ‘진곱빼기’였다. 청보식품에서 생산했던 이 제품은 회사 부도 후 오뚜기가 인수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농심의 후발주자에 만족해야 했던 오뚜기. 최근 들어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2015년 10월 출시된 ‘진짬뽕’이 라면 업계에 혁명을 불러왔다.

진짬뽕 출신이후 간식과 허기를 달래는 이미지는 ‘프리미엄’으로 전환하게 된다. 이에 비싸지만 그만큼 값어치를 하는 프리미엄 라면이 대세로 떠올랐다. 오뚜기는 라면 업계의 강자 농심을 위협하고 있다. 지난해 진짬뽕의 인기에 힘입어 매출 2조원을 돌파했으며 라면시장 점유율 20%를 돌파하면서 한 때 신라면의 아성을 무너뜨리기도 했다.

오뚜기는 라면뿐만 아니라 인스턴트 카레, 마요네즈 등 보다 다양한 식품을 생산해 대한민국 식품산업에 한 획을 그었다. 1972년 출시된 ‘오뚜기 마요네스’는 현재까지 국내시장 점유율 이 90%에 이를 정도로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1981년 선보인 ‘3분요리’도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다. 당시 첫 해에만 400만개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는 진기록을 세웠다.

크림빵·호빵

라면 못지않게 국민들의 허기를 달래주던 간식으로 빼놓을 수 없는 게 ‘빵’이다. 삼립식품이 1964년 처음 출시한 ‘삼림 크림빵’은 출시 이후 현재까지 약 16억 개 이상 팔린 스테디셀러 식품이다.

삼립식품의 전신은 1945년 세워진 '상미당'이다. 상미당은 1961년 삼립산업제과공사로 사명을 변경하고 빵과 비스켓 등을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삼립식품은 또 1971년 ‘삼립 호빵’을 출시하며 ‘국민 빵’을 생산하는 기업으로 거듭났다.

삼립식품의 형제기업인 ‘샤니’도 빵을 생산하는 기업으로 유명하다. 삼립식품의 전신인 삼립식품공업은 1972년 한국인터내셔날식품(現 샤니)을 세웠다. 이후 1983년 삼립식품으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80년대 들어 형제기업인 삼립과 샤니는 찐빵 등 관련 분야에서 업계 1, 2위를 다투게 된다.

샤니는 1985년 미국의 던킨그룹과 합작해 비알코리아를 세우고 이듬해에는 프랑스풍 베이커리를 표방한 (주)파리크라상을 설립해 파리바게뜨 브랜드를 출시했다. 이후 샤니는 던킨도너츠, 배스킨라빈스 등의 브랜드를 잇따라 출시했다. 샤니는 대형 프랜차이즈 제과점 시대의 포문을 열었다. 샤니는 파리크라상, 파리바게뜨, 배스킨라빈스 등의 성공에 힘입어 1996년 형제 기업인 삼립식품을 제치고 업계 1위로 올라섰다.

샤니는 2002년 삼립식품을 인수했으며 2004년 삼립식품을 모기업으로 하는 SPC그룹을 출범시켰다. ‘S’는 삼립식품과 샤니를, ‘P’는 파리크라상과 파리바게뜨를, ‘C’는 다른 계열사를 의미한다. 1945년 서민들의 배고픔을 달래주기 위해 세워진 식품기업이 현재 대한민국 곳곳에 퍼져있는 대형 프랜차이즈 식품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초코파이=정

대한민국 대표 간식 ‘초코파이’는 탄생 일화부터 독특하다. 당시 동양제과(현재 오리온)의 김용찬 과자개발팀장이 미국 조지아주 출장길에 들른 한 호텔 카페에서 초콜릿을 입힌 과자를 먹어 본 뒤 맛에 감탄해 국내 개발에 들어갔다. 이후 출시된 초코파이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게 된다.

초코파이를 개발한 동양제과의 전신은 1934년 설립된 풍국제과다. 1962년 오리온제과공업으로 상호를 변경했고 1974년부터 초코파이를 생산·판매하기 시작했다. 초코파이의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자 1983년 롯데제과, 1986년 해태제과, 1989년 크라운제과에서 각각 초코파이를 생산했다.

이에 동양제과는 롯데제과에 상표등록 취소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으나 법원은 “초코파이라는 이름은 빵과자에 마쉬멜로우를 넣고 초콜릿을 바른 과자류를 뜻하는 보통 명칭이다”라며 소송을 기각했다. 이에 동양제과는 1989년 기존의 초코파이를 ‘초코파이 정(情)’이라는 이름으로 변경했다.

초코파이는 중국과 북한에서도 큰 인기를 누렸다. 개성공단에 입주한 남측 공장주들이 2005년부터 북측 근로자들에게 초코파이를 간식으로 지급하면서 이것이 다시 북한 암시장에 풀려 비싸게 팔리기도 했다. 초코파이 7개 값이면 북한 일반 근로자 한 달 월급과 같은 돈이었다.

인기가 치솟자 북한은 주민들이 남한의 식품에 선동될 것을 우려했다. 북한은 개성공단에 입주한 기업들에게 초코파이를 간식으로 지급하지 말아줄 것을 요청했고, 2014년부터 초코파이 제공이 중단됐다.

장수 제품

대한민국의 대표 과자들은 대개 70년대 처음 출시돼 오랜 기간 사랑받아온 제품이 대부분이다. 시대가 변해도 여전히 사랑받은 제품들이 많다. 그 중 하나가 1975년 출시된 해태제과의 ‘맛동산’이다. ‘맛동산’은 출시된 이래 40년 동안 28억 개 이상 판매됐다. 이후 1974년 ‘에이스’, 1979년 ‘웨하스’, 1981년 ‘홈런볼’, 1984년 ‘오예스’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국민 과자들이 출시돼 지금까지 사랑받고 있다.

국민 과자 생산에 기여한 기업으로는 해태제과와 롯데제과가 있다. 먼저 해태제과의 전신은 1945년 설립된 해태제과합명회사다. 박병규, 민후식, 신덕발, 한달성 등 4명이 공동 창업해 최초의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식품회사였다. 1960년 사명을 해태제과공업으로 바꿨으며 박병규 창업주가 타계하고 1981년 박 창업주의 장남 박건배 전 해태그룹 회장이 그룹을 이끌었다. 1987년 상호를 해태제과(주)로 변경했다.

이후 1998년 법정관리에 들어가 해체수순을 밟은 뒤 2005년 크라운제과 컨소시엄 출자로 설립된 해태제과인수목적특수(주)가 해태제과식품(주)의 지분을 100% 인수해 해태제과식품(주)이 출범하게 된다. 해태제과식품은 국민 식품기업 답게 위기를 딛고 재도약에 성공했다. 지난 2014년 출시된 ‘허니버터칩’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롯데제과도 국민 간식을 책임져온 식품 기업이다. 신격호 전 롯데그룹 회장은 1965년 한일국교가 정상화된 것을 계기로 자본금 3000만원으로 롯데제과를 세웠다. 롯데제과는 1972년 천연 치클을 이용한 쥬시후레시, 후레시민트, 스피아민트 등 3종류의 껌을 시중에 선보여 히트시켰다.

이후 1979년 ‘빠다코코낫’, 1983년 ‘빼빼로’, ‘꼬깔콘’, 1984년 ‘칸쵸’, 1993년 ‘엄마손 파이’ 등 국민 과자로 불릴 만한 인기 품목들을 생산·판매했다.

국민간식 “판매량 열전”

해방 이후 70년 동안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국민 간식은 명성 만큼이나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했다. 농심 ‘새우깡’은 1971년 출시 이후 지난해 상반기까지 총 77억5000만 봉지가 팔리는 진기록을 세웠다. 우리나라 국민 1인당 150봉지씩 구매한 셈이다. 판매량을 모두 펼쳐 놓으면 아시아 대륙을(4400만㎢) 모두 덮을 수 있을 정도다.

1986년 출시된 농심 ‘신라면’은 지금까지 280억 봉지 이상 판매됐다. 지금까지 팔린 신라면의 면을 모두 이으면 지구를 3만5000번 휘감을 수 있는 정도다. 지구에서 태양까지 약 5번 왕복할 수 있는 길이다. 신라면은 현재까지도 국내에서만 연간 4500억원가량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해태제과의 '맛동산'은 1975년 출시 돼 누적 판매량 28억 개를 돌파했다. 국민 1인당 55봉지씩 구매한 셈이다. 이를 일렬로 늘어놓으면 지구에서 달까지 1회 왕복 할 수 있는 길이며 제품 봉지를 펼쳐 놓을 경우 여의도를 30번 덮을 수 있는 면적이다.

롯데제과의 장수 스낵 ‘꼬깔콘’은 1983년 출시 이후 23억 봉지 이상 팔렸다. 이를 일렬로 늘어놓으면 지구 둘레를 15바퀴가량 돌 수 있는 길이다.

과자뿐만 아니라 오뚜기 ‘마요네스’의 판매량도 약 38억 개(300g 튜브형 제품 기준)에 달하며 이를 일렬로 이으면 지구 15바퀴를 거뜬히 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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