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사진은 80년대 화순지역 탄광 모습. 가운데는 삼성엔지니어링이 사우디 알 주바일 지역에 건설한 정유공장. 오른쪽은 신고리 3·4호기 전경.

[민주신문=신상언 기자] 국가 기간산업이란 한 나라 경제활동의 토대가 되는 산업을 말한다. 그 중 가장 기본이 되는 산업이 전기·석탄·석유 등 에너지 산업이다. 에너지 산업은 국가 제조업의 동력이자 경제성장의 촉매제 역할을 한다. 에너지는 공공재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에너지 산업은 대한석탄공사·한국석유공사 등 국가 주도하에 공기업 형태로 운영돼 왔다. 대한민국은 그동안 석탄·석유·가스·원자력 등 시대에 맞는 에너지 산업을 발전시켜 왔다. 경제비사 제7탄은 대한민국의 에너지 역사에 관한 이야기다.

1950년대 에너지 산업은 석탄이 주를 이뤘다. 대한석탄공사는 1950년 창립된 대한민국 1호 공기업이다. 자본금 1000만원, 6개 광업소로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전력수급은 주로 화력발전소에 의존했기 때문에 석탄의 공급이 산업발전 성패의 관건이었다.

대한석탄공사는 석탄광산의 개발 운영과 가공에 관한 기술적 연구를 책임졌다. 또 석탄가공제품의 매입, 판매, 수출입 등 영업활동과 석탄산업에 종사하는 근로자의 교육훈련 등을 이끌었다. 이밖에 정부로부터 위탁받은 사업 등을 도맡았다. 

특히 민영광산에서 꺼리는 비채산성 탄광을 개발했으며 산간벽지 등에 석탄을 공급하는 일도 했다.

대한석탄공사는 1000만원이라는 소규모 자본금으로 출발했다. 초기 자본금의 부족 등 어려움을 겪었지만 석탄 생산 100만 톤을 생산하며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다. 

이후 1967년 나전·성주 광업소를 매입하면서 1968년 자본금을 100억원으로 증자했다. 1976년엔 석탄 수입 업무도 시작했다.

한국경제가 70년대 들어 중화학공업 위주의 산업으로 재편되면서 석탄은 더욱 중요한 에너지원이 됐다. 1980년 자본금은 1500억원으로 늘어났고 이듬해인 1981년에는 생산 누계 1억 톤을 달성하기도 했다. 1988년에는 한 해 생산량 522만 톤을 돌파하면서 석탄 산업은 절정에 이르렀다.

하지만 90년대 들어 석탄의 시대는 저물어갔다. 석탄을 통한 화력발전에 대한 환경문제가 사회적으로 대두됐으며 더 효율적인 대체 에너지가 개발되면서 석탄의 수요는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1990년대부터는 전국의 탄광이 서서히 폐지되기 시작했다.

1990년 나전·영월 광업소가 매각되고 성주광업소가 폐광됐다. 1993년 함백 광업소가 폐광되고 홍콩지사 및 광주지사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 뒤 1994년 우성광업소, 1996년에는 부산지사, 묵호사무소, 수색사무소가 차례로 폐지됐다. 대한민국 대표 기간산업으로서 경제 성장의 중추 역할을 했던 석탄의 시대는 그렇게 저물었다.

석유

석탄의 시대가 저물어감과 동시에 석유의 시대가 찾아왔다. 정부는 석유자원의 개발과 석유비축 및 석유유통구조의 개선을 위해 1979년 ‘한국석유개발공사법’에 의거, 한국석유공사를 발족했다.

석유는 전기 생산을 위한 에너지원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자동차, 난방 등 국가 전반에 필수적인 중요 에너지원이 됐다. 1·2차 석유파동에서 경험했듯 석유의 안정적인 수급은 국가경제와 직결되는 아주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한국석유공사는 석유개발사업의 활성화를 위해 탐사 및 개발광구의 확보에 주력하는 한편 이미 확보한 광구에 대해선 매장량 및 생산량 확보를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석유수급의 안정과 유가안정을 위해 비축유의 구입, 비축유 적기대여 등 설립목적 달성에 필요한 업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했다.

1982년 한국석유시추, 1986년 한국송유관을 설립했고 1987년에는 국내 대륙붕에서 최초로 가스를 발견하기도 했다. 1995년 석유개발센터를 준공하고 2001년에는 '동해-1' 가스전 착공 및 베트남 15-1광구 유전개발을 선언했다. 

2005년 카자흐스탄 사무소, 2007년 캐나다 사무소를 각각 개소하면서 국가 기간산업으로서 안정적 에너지원을 공급해 왔다.

최근엔 국내 대륙붕의 기존 탐사자료에 대해 국내 산업, 학교, 연구기관 기술진의 합동으로 종합기술평가를 실시해 동해분지, 울릉분지, 동중국해분지 등 3개 퇴적분지에서 석유부존의 가능성을 확인하기도 했다. 에너지 자립에 한 발짝 다가선 것이다. 

기간산업으로서 경제의 밑바탕 역할을 하는 것을 너머 에너지 수출로 경제 성장에 기여하는 역할까지 기대해 볼 수 있게 됐다.

가스

70년대 대한민국 경제는 1·2차 석유파동으로 인해 몸살을 앓게 됐다. 이에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에너지원 공급의 한계점을 뼈저리게 느끼게 됐다. 

정부는 에너지 다원화 정책을 추진하기로 하고 대체 에너지원으로 액화천연가스(LNG)의 도입을 추진하기로 한다. 이에 1982년 ‘한국가스공사법’을 발의, 1983년 한국가스공사가 설립된다.

정부는 1986년 국내 최초로 액화천연가스를 도입·공급했다. 90년대 들어 전국에 천연가스를 공급하기로 계획하고 93년에는 중부권에 천연가스를 공급했다. 95년에는 영·호남권, 이듬해엔 부산까지 천연가스를 공급하기에 이른다.

한국가스공사는 천연가스의 제조와 공급, 그 부산물의 정제·판매 등 업무를 추진했다. LNG 인수기지 및 공급망의 건설·운영은 물론 천연가스 및 액화석유가스(LPG)의 개발 및 수출입과 관련된 사업을 시행해 왔다.

1986년 인도네시아 아룬기지로부터 천연가스를 도입했다. 천연가스를 -162℃로 냉각하고 부피를 600분의 1로 압축시켜 특수선박으로 수송했다. 이것을 지하배관을 통해 도시가스용 및 발전용 연료로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이후 천연가스는 전 세계에 광범위하게 부존돼 있고 그 매장량이 풍부해 석유의 대체에너지로서 지금까지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또 공기보다 가벼워 사용 시 누출될 경우에도 공기 중으로 쉽게 날아가 화재 위험성이 매우 적은 장점이 있다. 분진·유황 등의 공해물질이 전혀 섞이지 않은 깨끗한 무공해 연료이기 때문에 쾌적한 생활환경을 조성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게 될 뿐만 아니라 사용하기에도 편리해 국민생활의 편익증진에도 기여했다.

한국가스공사는 국영석유공사인 페르타미나사와 1986년부터 2006년까지 20년 동안 매년 200만 톤의 LPG를 들여오기로 장기도입계약을 체결했다. 정부의 이 같은 노력으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7번째로 LNG를 많이 사용하는 나라가 됐다. 값싸고 청정 연료인 LNG의 안정적 공급 덕분에 우리나라 에너지 수급은 안정성을 더욱 확보할 수 있었고 경제 성장에 큰 도움이 됐다.

전기

전기 산업은 100년 이상 한국경제를 지탱해온 국가 기간산업이다. 대한민국의 전기 공급을 책임지는 한국전력공사는 1961년에 설립됐지만 전기산업의 최초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더 된 18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한민국 최초의 전기회사는 1898년 1월에 세워진 한성전기회사다. 1899년 전차가 개통됐고 1900년 최초로 민간전등이 생겼다. 그러면서 1901년 부산전등주식회사, 1905년 인천전기주식회사, 1912년 원산수력전기주식회사가 각각 설립됐다.

그 뒤 전기를 공급하는 회사가 지속 설립돼 운영되면서 1961년 6월 ‘한국전력주식회사법’이 공포됐다. 이때 조선전업주식회사·경성전기주식회사·남선전기주식회사 등이 통합돼 한국전력주식회사가 발족됨으로써 전국의 전력사업을 총괄하게 됐다.

한국전력주식회사는 석탄, 석유, 원자력 사업의 정점에 위치해 있었다. 석탄이든 석유든 결국 전기에너지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한국전력은 1965년 춘천수력발전소를 준공했고 1965년 서귀포수력발전소의 발전을 개시했다. 

1969년엔 부산화력3·4호기, 1970년엔 제주화력발전소를 준공했다. 같은 해 영남화력발전소를, 1971년 고리원자력발전소를 기공하는 등 전국에 각종 발전소 건립에 앞장섰다. 이러한 발전소 건립에 기초해 대한민국은 안정적인 전기 수급을 할 수 있었고 이는 경제성장의 든든한 밑바탕 역할을 했다.

이후 1980년 ‘한국전력공사법’의 공포로 1982년 전액 정부투자기관이 되면서 한국전력공사가 출범하기에 이른다. 한국전력공사 주도하에 전원개발사업을 활발히 추진한 결과 대한민국은 충분한 예비전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광복 이후 오랜 전력기근에서 해방되고 수급의 안정을 유지하면서 경제발전을 뒷받침했다. 그 결과 1961년 창립 당시 36만7000㎾에 불과하던 발전시설용량은 1991년 2113만㎾로 늘어나게 됐다. 30년 만에 60배 가까이 성장한 것이다.

설비내용도 원자력발전소와 양수발전소, 가스·석유겸용발전소 등 최신설비가 도입되고 단위용량도 점차 대형화되면서 양적인 발전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엄청난 성장을 거뒀다. 1997년 한국의 발전설비는 4000만 ㎾를 돌파해 발전설비 보유량 세계 17위의 전력 선진국 대열에 진입했다.

2015년 기준 한국전력공사의 총 자산은 106조3062억원, 연간 매출액은 58조5403억원에 달한다. 발전소 34개소, 전력관리본부 9개소, 변전소 192개소, 전력소 43개소이고, 지사 5개소, 지점 84개소, 출장소 45개소, 해외사무소 6개소(뉴욕·파리·북경·토론토·도쿄·밴쿠버) 등을 갖춘 거대조직으로 성장했다. 여전히 한국경제의 큰 축을 담당하는 에너지 산업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원전

1980년대 이후 에너지 산업은 원자력으로 치우치게 된다. 전력수요가 점점 증가하면서 더 효율적이고 획기적인 방식의 에너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원전은 1978년 가동되기 시작한 고리1호 원전이다.

고리 1호기는 설비용량 58만7000㎾에 달했으며 총 1560억이 투입된 당시 국내 최대 규모 사업이었다. 미국 정부의 차관과 미 원전회사 웨스팅하우스의 기술을 지원받아 시행됐다. 고리 1호기의 가동으로 대한민국은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2번째, 세계에서는 21번째 원전 보유국이 됐다.

고리 1호기가 첫 가동을 한 건 1978년이지만 정부는 1960년대부터 원자력 발전소 건립을 위해 준비해 왔다. 1962년 한국원자력연구소가 원자로 점화에 성공한 것. 

정부는 70년대 석유파동을 겪으면서 에너지원의 다원화는 물론 원자력의 필요성에 대해 절감하게 된다.

이에 1978년 고리 1호기를 시작으로 1983년도에는 고리 2호기, 1985년에는 3호기가 상업운전을 개시했다. 또 월성원자력 발전소도 1983년 1호기를 시작으로 97년 2호기, 98년 3호기가 운행에 들어갔다. 원전이 들어서면서 대한민국의 전력 생산은 급증하게 된다. 

반면 전력요금은 상대적으로 저렴해졌다. 1982년 이후 지난해까지 소비자물가가 271% 상승하는 동안 국내 전력요금은 49% 상승하는데 그쳤다.

현재 대한민국에는 총 25기의 원자력 발전소가 가동 중에 있다. 2001년에는 한국수력원자력이 한국전력으로부터 독립해 설립됐다. 2014년 기준 한국수력원자력은 국내 전력의 31.9%를 생산하고 있다. 이 중 원자력발전량은 96.3%에 달한다.

원전은 극대화된 효율성으로 30년 넘게 대한민국의 에너지 산업을 책임져 왔지만 원전의 노후화와 안전성 문제를 동반하고 있어 사회적 문제가 됐다. 

원자력 사고와 주변 환경에 미치는 영향, 핵폐기물 처리문제 때문에 환경운동가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이러한 움직임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특히 고리 1호기는 2007년 설계수명(30년)이 종료됐지만 정부로부터 계속운전 허가를 받아 2017년 6월18일까지 수명이 10년 연장됐다. 이에 시민단체와 지역주민들은 낡은 고리 1호기가 고장이 잦아 안전성에 문제가 있다며 반발하고 나섰다. 

고리 1호기는 가동 이후 지난해까지 사고·고장 건수가 130건으로 국내 원전 중 가장 많았다. 이후 여론에 무게가 실리면서 결국 고리 1호기는 계속운전 만료일인 올해 6월18일까지 가동된 뒤 운전을 멈출 예정이다.

또 세계적으로 원전 반대 운동이 일어나고 친환경 대체에너지 개발이 주목받으면서 원전은 불안한 미래를 맞이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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