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정주영(왼쪽) 현대그룹 회장과 나와프 사우디 왕자가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건설 공사 계약식 후 환하게 웃고 있다. 오른쪽은 당시 주베일 항만 공사 현장.

[민주신문=신상언 기자] 경제는 흥망성쇠를 거치며 발전한다.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다가도 그것이 독이 돼 위기의 순간에 직면하기도 한다. 그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운명이 달라진다. 위기의 순간에 좌초돼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가하면 위기를 딛고 더 큰 성장의 흐름을 타는 국가도 있다. 한국 경제도 해방 이후 숱한 위기를 겪어 왔다. 그때마다 한국인 특유의 국민성으로 극복해 왔다. 경제비사 제6탄은 한국경제 반백년사의 시대별 위기와 극복의 역사를 들여다봤다.

6.25 한국전쟁 이후 한국 경제는 삼백산업과 경제개발 5개년 개발계획 등을 바탕으로 성장가도를 달리게 된다.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비약적인 성장을 보이던 한국경제에 처음으로 찾아온 위기는 1차 석유파동이었다.

중동전쟁이 석유파동 발생 배경이다. 

중동전쟁은 1948년부터 1973년까지 4차례에 걸쳐 이스라엘과 아랍국가 간에 벌어진 전쟁을 말한다. 

아랍과 유대인 사이의 대립분쟁이 주원인이었는데 1차는 1948년, 2차는 1956년, 3차는 1967년, 4차는 1973년에 발발했다.

문제는 1973년 발발한 4차 전쟁으로 인한 정치적 분쟁이 석유 분쟁으로 번졌다는 점이다. 

4차 전쟁은 이집트와 시리아가 1~3차 전쟁에서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하면서 시작됐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반격에 나서면서 주도권을 장악해 또다시 전쟁에서 승리하게 됐다. 이후 UN에서 미-소 결의로 휴전이 성립됐다.

1차 석유파동

이에 페르시아만(灣)의 6개 석유수출국들은 1973년 10월16일 OPEC(석유수출국기구) 회의에서 원유고시가격을 17%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또 이스라엘이 아랍 점령지역에서 철수하고 팔레스타인의 권리가 회복될 때까지 매월 원유생산을 전월에 비해 5%씩 감산하기로 결정했다. 석유를 중동전쟁의 무기로 사용할 것을 천명한 것이다.

이 결정으로 세계는 ‘에너지 위기’에 빠지게 됐다. 이후 OPEC의 페르시아만 산유국들은 1974년 1월1일을 기해 배럴당 5.119달러에서 11.651달러로 원윳값을 인상했다. 

1차 석유파동은 전세계 경제를 혼돈에 빠뜨렸다. 

기간산업의 대부분을 석유에 의존하던 서방세계는 석유부족으로 제품생산에 어려움을 겪었고 가격 상승으로 인해 세계적인 불황과 인플레이션을 겪어야만 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70년대 초반 한국경제는 중화학공업으로의 전환이 한창 이뤄지던 시기였기 때문에 석유 의존도와 중요성이 날로 커져갔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차 석유파동 당시 우리나라의 물가상승률은 3.2%에서 24.3%까지 치솟았다. 반면 경제성장률은 12.3%에서 7.4%로 떨어졌다. 실업률도 4.0%에 달했으며 무역수지는 마이너스 10억 달러에서 마이너스 23.9억 달러로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한국경제는 이른바 ‘중동 특수’가 파생시킨 ‘오일달러’로 1차 석유파동을 이겨냈다. 

석유 값 상승으로 벼락부자가 된 중동 국가에 진출해 돈을 벌어오는 것이다. 

당시 가장 먼저 중동에 진출해 소위 대박을 터트린 기업은 ‘삼환건설’이었다. 삼환기업은 1973년 12월 사우디의 164km 고속도로 공사를 2400만 달러에 수주했다. 또 이듬해 9월에도 제다시(市)의 고속도로 공사를 2400만 달러에 따냈다.

1975년에는 현대건설이 중동 특수에 뛰어들었다. 바레인 조선소 건설을 시작으로 해군기지 공사, 주베일 항만 공사 등을 따냈다. 

이같은 중동 특수로 우리나라는 1978년까지 81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이게 된다. 

이는 당시 우리나라 수출액의 40%를 육박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중동 특수 덕분에 우리나라는 세계를 강타한 1차 석유파동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외환위기 극복 당시인 1998년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서 열린 금 모으기 행사에서 1kg짜리 금괴가 95개나 접수됐다.

2차 석유파동

대한민국이 중동 특수로 1차 석유파동을 극복한 지 몇 년 되지 않아 2차 석유파동이 경제를 강타했다. 

1978년 OPEC은 석유가격을 배럴당 12.70달러에서 단계적으로 14.5%씩 인상하기로 결정했다. 

같은 해 이란도 석유생산을 대폭 감축시키고 수출을 중단했다. 그 결과 1차 석유파동 이후 6년 만에 석유가격이 20달러선을 돌파하는 등 제2차 석유파동이 발생하게 됐다.

제2차 석유파동의 여파로 선진국의 경제성장률은 1978년 4.0%에서 1979년 2.9%로 낮아졌다. 물가도 소비자물가상승률 10.3%를 기록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1979년 물가상승률이 18.3%에서 1980년 28.7%로 치솟았으며 경제성장률도 6.4%에서 마이너스 5.7%를 기록했다. 

70년대 들어 중화학공업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높아지면서 2차 석유파동은 1차 당시보다 한국경제에 더 큰 피해를 미칠 수밖에 없었다. 

석유파동으로 인한 경제적 위기는 사회·정치적 위기를 격화시켜 10·26사태와 유신체제의 붕괴를 가져오기도 했다.

2차 석유파동의 영향으로 한국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지만 세계 경제의 정세변화 덕분에 위기를 극복하게 된다. 

1985년 선진 5개국 재무장관회담의 합의에 따라 각국의 통화를 평가절상시키는 이른바 ‘플라자합의’가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엔화와 서독 마르크화가 70%이상 절상되고 대만의 원화 역시 36%이상 절상됐다. 

반면 한국의 원화 절상은 11.2%에 그쳤고 덕분에 수출경쟁력이 강화됐다. 3저 호황의 시작이었다. 3저 호황이란 1986년부터 1988년까지 저달러·저유가·저금리 현상 덕분에 유례없는 호황을 누렸던 것을 일컫는다. 

한국경제는 3년 동안 연 10%의 고도성장을 하게 된다. 또 사상 최초로 무역수지 흑자를 달성하게 된다. 이후 1988년 올림픽 특수까지 겹쳐 한국 경제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IMF 외환위기

80년대 호황을 거듭하던 대한민국 경제의 이면엔 커다란 거품과 부채가 자리하고 있었다. 수출이 주춤하면서 무역수지도 적자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외환보유액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기업들은 무리하게 돈을 끌어다 썼다. 은행도 마찬가지였다. 재정건전성을 등한시한 채 자기자본 대비 400%가 넘는 대출을 기업에 허용해 금리장사를 했다.

대한민국은 1996년 OECD에 가입하면서 호황은 영원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1996년 중국이 자국의 수출경쟁력 강화를 위해 ‘경상계정의 위안화 자유태환’을 실시한 것을 시작으로 아시아에 몰렸던 자금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은행들은 기업에 자금 상환을 요구했지만 기업들은 이미 상환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1997년 1월부터 한보와 삼미, 진로그룹 등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이 줄도산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당시 50대 대기업 중 30개가 문을 닫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대한민국의 외환보유액은 40억 달러에 불과했다. 반면 빚은 304억 달러에 이르렀다. 결국 정부는 1997년 12월3일 국제통화기금(IMF)에 195억 달러의 구제 금융을 요청했다. 간신히 국가부도 사태는 면했지만 IMF 관리체제에 들어가게 됐다.

미국이 주도하는 IMF의 요구조건은 혹독했다. 연 20%가 넘는 초고금리 처방을 내렸으며 부채비율 200% 룰을 강요해 사실상 산업 전체를 와해시켰다. 

IMF 체제 하에 혹독한 구조조정이 이뤄졌다. 부실기업과 은행은 정리되거나 흡수·합병됐다. 일터를 잃은 가장들은 길거리로 내몰렸고, 다행히 기업에 남은 사람들도 임금 삭감을 받아들여야 했다.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대 위기였다.

1997년 12월18일 故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IMF 체제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됐다.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처럼 1997년 금 모으기 운동이 시작됐다. 단군 이래 최대 위기에 직면한 국민들은 애국심과 단결력을 발휘했다. 

금은 곧 달러처럼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집집마다 장롱 속 금을 모아 나라의 빚을 갚자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당시 금 모으기 운동에 참여한 인원은 전국적으로 약 351만명에 달했다. 모인 금의 양도 약 227톤 이상이었다. 

달러로 환산하면 약 21억3000달러어치였다. 금 모으기 운동은 국가경제가 어려운 가운데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희생정신을 발휘한 대표적인 사례로 남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당선되자마자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했으며 노동자와 기업인 대표를 불러 모아 경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짜냈다. 외국인 투자자를 끌어들이고 수출을 늘려 무역 수지를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았다.

국민의 희생과 정부의 노력 덕분에 외환 보유액은 조금씩 늘어났고 외환 위기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정부는 1999년 9월 외환위기 극복을 선언했으며 2001년에는 비로소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IMF 자금을 갚았다. 

이듬해인 2002년에는 한·일 월드컵이 열라면서 월드컵 4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뤘다. 스포츠를 통해 대한민국에 대한 자부심이 절정에 달해 국민이 더욱 뭉치는 계기가 됐고 외환위기의 아픔도 말끔히 치유될 수 있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IMF의 위기를 극복한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2008년 세계금융위기로 또 한 번 위기를 맞는다. 세계금융위기는 2007년 미국에서 시작된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로 인해 발생하게 된다.

2000년대 초반 9·11테러와 아프간 전쟁 등으로 미국 경기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에 미국은 경기부양책으로 초저금리 정책을 펼쳤다. 

주택융자 금리가 인하됐고 부동산가격이 치솟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주택담보대출인 서브프라임모기지의 대출금리보다 주택가격 상승률이 높았기 때문에 무리해서라도 빚을 져 주택을 구매했다. 또 증권화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은 높은 수익률이 보장된 신용등급이 높은 상품으로 알려져 거래량이 폭증했다.

하지만 2004년 미국이 저금리 정책을 종료하면서 부동산 거품이 꺼지기 시작했다. 서브프라임모기지론 금리가 올라갔고 저소득층 대출자들은 원리금 상환능력을 상실하게 됐다. 

증권화돼 거래되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을 구매한 금융기관들은 대출금 회수불능사태에 빠져 손실이 발생했다.

미 정부는 개입을 공식적으로 부정했다. 이는 미국의 대형 금융사, 증권회사의 파산으로 이어졌다. 

이는 곧 세계적인 신용경색을 가져왔고 실물경제에 악영향을 줬으며 세계 경제시장에까지 타격을 줘 세계금융위기를 초래하게 됐다.

이에 한국도 엄청난 경기 침체를 겪어야만 했다. 

세계 경제의 흐름은 실물보다 금융자본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초국가적인 양상을 보이는 만큼 미국 은행들의 파산은 신흥국인 한국 시장에 지대한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전반적으로 대외수출 감소, 투자 감소, 소비 감소 등을 동반하게 됐고 미국에 대한 대외의존도 역시 심해 피해는 더욱 가중됐다. 

2009년 세계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0.1%를 기록한 이래 이듬해 5.4%로 치솟았다가 장기 침체에 빠져 지난해에는 2.9%의 성장을 기록했다. 

한국도 세계 경제 흐름에 따라 비슷한 곡선을 보이며 침체의 늪에 빠졌다. 이제 저성장이 만연화 된 시대가 돼 버렸다.

하지만 한국경제는 세계적인 침체의 늪 속에서 나름 선전하고 있다. 세계경제위기가 발발한 2008년 당시 한국은행은 중국인민은행과 1800억 위안(260억 달러 상당)의 통화 스와프 협정을 체결했다. 또한 한국은행은 일본은행과의 통화 스와프 규모를 기존 130억 달러에서 300억 달러로 확대하는 협정도 체결했다. 

당시 중국이 다른 나라와 통화스와프를 체결한 것은 사상 최초였다. 중국, 일본은 세계 외환보유고 1위, 2위 국가였고 한국은 경제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착실하게 준비를 해 나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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