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민주신문=신상언 기자] 경제비사 시리즈 제1탄은 현재 대한민국을 이끌고 있는 10대 그룹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 뒷이야기에 집중했다. 작은 상점이 거대 초일류기업으로 성장하게 된 성공스토리다. 반대로 제2탄은 1970년대 산업화가 한창인 시절 대한민국 경제를 떠받치던 10대 그룹이 현재 어떻게 변모했는지를 조명해봤다. 현재까지 과거의 영광을 이어나가고 있는 그룹, 과거에 머물러 정체된 그룹,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그룹 등 재벌의 굴곡진 변천사를 들여다봤다.

신진-자동차 재벌의 몰락

공정거래위원회 ‘한국재벌사’ 자료에 따르면 신진자동차공업은 1972년 기준 재계 서열 4위에 올랐던 기업이다. 더욱이 현대와 기아차가 글로벌 자동차 기업으로 발돋움하기 이전에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을 이끌었다. 현재는 한국GM의 전신이라는 이름으로만 기억될 뿐이다.

故김제원-故김창원 형제는 1955년 부산에서 신진공업사를 설립했다. 당시 신진공업사는 미군 차량의 엔진을 재생시키고 드럼통을 펴서 차체를 만드는 등의 방식으로 자동차를 생산했다. 이후 새나라자동차를 인수한 후 1965년 신진자동차공업을 설립해 토요타자동차와 기술 제휴를 맺게 된다. 기술 제휴를 통해 ‘신진 코로나(1966)’를 생산하면서 자동차 산업의 붐과 함께 대기업의 대열에 들어서게 된다.

당시 코로나의 가격은 83만원을 호가했다. 소고기 한 근에 200원 하던 시절이다. 하지만 코로나는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1966년부터 1972년까지 4만4000여대나 생산되며 큰 인기를 누렸다. 이후 신진자동차는 크라운, 퍼블리카 시리즈를 출시하며 큰 호황을 누렸다.

하지만 곧 위기에 직면한다. 신진자동차는 정부의 권유로 당시 적자를 기록 중이던 한국기계(현 대우중공업)를 인수(1969)하게 된다. 설상가상 1972년 토요타자동차가 한국시장에서 철수를 선언한다. 중국이 ‘주은래 4원칙’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중국이 대만과 국교를 맺고 있는 나라와 관계를 맺는 나라까지도 거래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중국 시장 진출을 꿈꿨던 토요타자동차는 대만과 국교를 맺었던 한국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신진자동차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제너럴모터스(GM)과 기술제휴를 맺고 GM코리아를 설립했다. 이후 '쉐보레 1700', '카미나', '레코드 1900' 등의 모델을 출시했으나 현대, 기아차 등 후발주자와의 경쟁에서 밀려 고전을 면치 못했다.

1976년 한국 측 지분을 산업은행이 인수, 새한자동차로 사명을 변경했지만 1978년에 산업은행이 보유지분을 대우그룹에 넘기면서 1983년 대우자동차(현재 한국GM)가 출범했다. 하지만 대우자동차 역시 2000년 도산하면서 2001년 GM이 대우의 승용차부문을 인수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70년대 신진자동차 공장 내부 전경.

대한전선-문어발에 발목

대한전선은 1950년대 재계 순위 5위권, 1972년에는 7위권을 유지하던 대기업이었다. 창업주 故설경동 전 회장이 1955년 국내 최초의 전선회사를 설립한 것이 출발이다. 주로 플라스틱 전력케이블, PVC 피복전선을 생산하며 성장의 기틀을 다졌으며 1966년에는 국내 최초로 알루미늄선 제조에 성공하기도 했다.

1970년대 들어 박정희 정부가 중화학공업 위주의 산업 구조를 개편하면서 전선 산업도 날개를 달게 된다. 이후 대한전선은 다양한 사업 분야로의 진출을 꾀하게 된다. 60년대 후반 가전 분야 진출에 이어 87년 스테인리스 스틸사업, 95년 알루미늄사업을 시작하면서 연간 5억 달러 규모의 해외 판매고를 올리기도 했다.

대한전선은 2000년대 들어 외연 확장에 더욱 힘을 쏟았다. 이는 전선 사업의 세가 위축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한 무리한 인수합병(M&A)이라는 고육지책이었다. 무주리조트를 인수(2002)하면서 관광·레저 사업에 진출했고, 진로(2003)와 쌍방울(2004), 명지건설(2007), 남광토건(2008), 온세텔레콤(2008)을 인수하며 사세를 확장했다. 이밖에 태양광발전업·부동산개발업·광섬유제조업·호텔운영업·신약개발업·컨설팅업 등에도 진출했다.

하지만 무리한 확장으로 2000대 중반 재무상황이 급격히 악화됐다. 이에 2009년 채권금융기관과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맺고 2012년에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2013년에는 설윤석 사장이 경영권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이후 2015년 사모펀드인 IMM PE에 인수돼 자율협약을 졸업했지만 대기업 집단에서 제외됐다.

신동아-비리‧그룹 해체

신동아그룹은 대한생명보험을 주축으로 하는 기업집단으로 1974년 당시 재계 8위 기업이었다. 창업주 故최성모 회장이 1953년 세운 조선제분이 신동아그룹의 시초다. 1960년대 밀가루 재벌로 불리며 사세를 확장했으며 1969년 대한생명보험을 인수했다.

이후 주요 사업 분야를 보험·금융·관광·서비스로 확장하면서 1985년에는 당시 동양 최대의 빌딩인 63층 여의도 사옥을 준공하기도 했다. 1997년 말 대한생명보험, 신동아화재해상보험, 대생기업, 대생개발, 동아제분, 대생상호신용금고, 태흥산업, 에스에이인터내셔널 등 계열사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최순영 전 회장이 무역업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 신동아그룹의 사세가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최 전 회장은 유령회사를 설립하고 국내 4개 은행으로부터 1억8500여만 달러를 대출받아 이 중 일부를 빼돌린 혐의로 1999년 2월 검찰에 구속됐다.

신동아그룹의 말로는 그리 좋지 않다. 최 전 회장을 구명하기 위해 그의 부인 이형자씨가 고위층 인사에게 옷 로비를 펼친 의혹에 휩싸이며 오명을 안게 됐다. 당시 이씨가 김태정 검찰총장의 아내 연정희씨에게 고급 옷을 선물했다는 언론보도가 나오면서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지만 ‘혐의 없음’으로 결론이 났다.

또 외환위기 영향으로 1999년 8월 대한생명보험이 부실금융기관으로 지정되면서 100% 정부 소유 기업이 됐다. 이에 관련회사 주식이 휴지조각이 됐고 최 회장도 경영권을 잃는 등 그룹이 해체되기에 이른다. 이후 63빌딩과 대한생명보험, 신동아화재해상보험은 한화그룹에 인수됐고 동아제분은 동아원그룹으로 넘어갔다.

대우-급성장·급몰락

대우그룹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한 기업 중 하나다. 김우중 전 회장은 1967년 섬유류 봉제품을 생산·수출하는 대우실업을 창립했다. 이후 섬유제품의 수출 호조와 경제성장 바람을 타고 금융, 전자, 자동차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했다. 1974년 수출 1억불을 달성하기도 했다. 1982년 대우그룹이 출범하고 새한자동차를 인수하면서 삼성, 현대, 럭키금성(현 LG)과 함께 대한민국 4대 그룹 대열에 들어섰다.

김우중 전 회장의 자서전은 베스트셀러가 되고 1992년 14대 대통령선거 출마설이 나오는 등 대우의 위세는 대단했다.

대우그룹은 IMF 외환위기에도 쌍용자동차를 인수하는 등 확장 정책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쌍용자동차 인수가 그리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또 외환위기로 인한 구조조정에 뒤늦게 대응함으로써 위기를 자초했으며 삼성자동차와의 빅딜협상까지 결렬됐다. 마지막으로 GM과의 협상에도 실패한 대우는 힐튼호텔 등 알짜자산을 매각하면서 위기를 타개하려 했지만 1999년 당시 부채비율이 400%에 육박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이에 워크아웃을 맞으며 그룹이 해체되고 대우는 1993년 세계경영 선포 6년 만에 몰락하게 된다.

김우중 전 회장은 1999년 11월 경영권 포기와 회장직을 사퇴하고 검찰 수사를 피해 도피생활을 했다. 이어 2006년 김 전 회장은 분식회계 및 사기대출, 횡령 및 국외 재산도피 혐의로 징역 8년 6개월, 벌금 1000만원, 추징금 17조9253억원을 구형받았으나 2007년 대통령 특사로 사면됐다. 현재 대우그룹은 해체됐지만 대우인터내셔널, 대우건설 등은 대우의 이름으로 성업 중이다.

국제-5공 희생양

1979년 재계서열 6위까지 올랐던 국제그룹은 지금은 생소한 기업이다. 1985년 그룹이 해체됐으니 벌써 30여년이나 지났다.

국제그룹의 시작은 1949년 故양정모 전 회장이 그의 부친과 함께 국제고무공업사를 설립하면서부터다. 양 전 회장은 ‘왕자표 고무신’으로 큰돈을 벌기 시작했고 ‘국제신발’을 세워 수출에 앞장섰다. 1970년대 초까지 신발 수출 붐을 타고 섬유, 해운, 금융 산업으로 확장을 시도했다. 직물가공업체 성창섬유, 국제상선, 신동제지, 동해투자금융, 동서증권, 동우산업, 조광무역, 국제토건, 국제종합엔지니어링, 원풍산업 등을 인수하며 덩치를 키웠다. 양정모 전 회장은 1981년 전경련 부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성장세를 멈추지 않던 국제그룹은 해체 과정에서 무성한 말들을 낳았다. 그룹이 돌연 해체하게 된 배경에 전두환 정권의 미움을 샀다는 얘기가 많았다. 전두환 군사정권의 정치자금 요구에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았으며 전두환 대통령이 주최한 만찬에 양 회장이 늦는 등 눈 밖에 날만한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결국 1985년 전두환 정권 하에서 그룹이 1주일 만에 해체되는 유례없는 기록을 남기게 됐다. 이후 주력 계열사였던 국제종합건설과 동서증권은 극동건설그룹에, 나머지 계열사와 국제그룹 사옥은 한일그룹에 각각 매각됐다.

양 전 회장은 5공이 끝난 뒤인 1993년 국제그룹 해체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해 승소했다. 하지만 1997년 IMF 외환위기와 2008년 세계금융위기 등을 맞으며 그룹 재건에 실패해 국제그룹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한일합섬·효성-정체

한일합섬은 섬유제조 전문회사로 1974년 재계 10위에 랭크됐다. 1964년 한일합성섬유공업으로 출발해 1974년 주식시장에 상장됐다. 1986년 국제상사(현 LS네트웍스), 남주개발, 원효개발, 원효물산을 인수했고 1987년 진해화학을 인수하면서 성장했다. 1993년 ‘한일합섬’으로 상호를 변경했다.

하지만 1997년 외환 위기의 어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1998년 회사가 부도 처리됐다. 1999년 회사정리 계획안이 인가됐다가 2007년 동양그룹에 인수돼 동양그룹 계열사로 편입됐지만 동양그룹도 2013년 10월 동양시멘트, 동양네트웍스가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그룹이 해체됐다.

효성그룹도 1979년 당시 5위권에 올라있던 대기업이었으나 재계 순위에서 많이 밀려났다. 1966년 설립된 동양나이론이 효성의 시초다. 섬유를 중심으로 회사를 확대해 나가다 타이어코드 공장을 준공했고 한영공업을 인수하면서 효성중공업(1977)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1980년 한국타이어와 대전피혁을 계열분리 했으며 1981년 조석래 회장이 효성중공업 회장으로 취임했다. 효성은 1996년 매출 1조원을 돌파하며 지금까지 대기업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으나 예전만큼 10대 그룹에 속할 정도는 아니다. 지난 9월 기준 효성은 재계순위 22위권이며 조석래 회장의 동생 조양래 회장이 이끄는 한국타이어는 30위권을 형성하고 있다.

삼성·현대·LG-건재

1974년 재계 1~3위는 럭키, 삼성, 현대였고 1979년도는 현대, 럭키, 삼성 순으로 재계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 기업은 2016년에도 여전히 재계 10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럭키는 현재 LG로 바뀌었으며 올해 9월 기준 재계 4위권을 유지하고 있고 계열 분리된 GS(7위), LS(16위)도 높은 순위에 올라있다. 격동의 역사와 치열한 경쟁 속에서 40여년을 버텨온 것이다.

삼성전자도 2000년대 들어 부동의 1위를 지켜오고 있으며 계열 분리된 CJ, 신세계도 14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현대도 현대차 2위, 현대중공업 9위, 현대백화점 20위 등 과거의 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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