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 두른 시신 두고 해석 분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비리수사와 관련해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목숨을 끊은 사건이 또 발생했다. 오근섭(62) 경남 양산 시장은 지난 11월 27일 경남 양산시 상북면에 위치한 자택에서 스스로 목을 매고 숨졌다.
 
두 가지 가능성
 
사건 당일인 지난달 27일. 아침식사 시간이 한참 지나서도 오 시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의 부인은 전날 오 시장 집을 방문했던 후배들에게 남편의 행방을 찾아봐 줄 것을 부탁했다. 후배들은 집 주변을 돌며 오 시장의 행방을 수소문했고, 오전 7시 10분 경 오 시장의 후배 중 한 명인 A씨는 자택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대연농장 별채 부엌에서 태극기와 양산시기를 몸에 두른 채 목을 매고 숨져있는 오 시장을 발견했다.

A씨는 경찰에서 “집 안팎을 둘러보던 중 오 시장이 별채 부엌 천장의 철제 빔에 노끈으로 목을 맨 채 숨져 있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진다. 경찰은 오 시장이 오전 5~6시경 자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오 시장은 검찰로부터 도시계획 변경과 관련, 부동산개발업자로부터 거액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었다. 지난달 25일 검찰은 오 시장에게 이틀 뒤인 11월 27일 오전 10시까지 울산지방검찰청으로 출석할 것을 약속받은 상태였다. 검찰에 소환되기 4시간 전 그는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됐다. 사건의 정황으로 보아 일각에선 ‘제2의 노무현 사건’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유서도 발견됐다. A4용지 2장 분량의 유서에는 ‘가족에게 미안하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 양산을 발전시키고 대한민국을 발전시켜 달라’는 등의 내용이 적혀져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유서에는 그의 심정, 검찰소환, 부동산 비리 등에 대한 어떠한 이야기도 실려 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갑작스러운 오 시장의 죽음. 무엇이 오 시장을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게 만들었을까. 오 시장 자살의 배경은 크게 두 가지로 분석된다. 하나는 비리혐의가 세상에 진실로 드러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라는 시각이다. 비리혐의가 진실로 밝혀질 경우 그동안 오 시장이 쌓아왔던 신뢰와 직원들의 존경은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일각에서는 비리혐의자 본인이 자살했을 경우 수사가 중단되기 때문에 비리와 연관된 지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오 시장이 고인이 된 이상 이런 주장은 확인할 길이 없어지게 된다.

또 다른 자살 배경 추측으로는 오 시장이 비리혐의를 받은 것에 대해 ‘극도의 수치심’을 느꼈거나, 혹은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서 자살했다는 시각이다. 오 시장은 검찰에 수사를 받기 전부터 시청직원들에게 ‘나를 믿어 달라’고 호소하는 등 결백을 주장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양산시청의 한 관계자는 오 시장을 “너무 곧은 나무여서 쉽게 부러질 수 있다”고 평가했다. 침통한 말투의 이 관계자는 “오 시장이 ‘나를 믿어 달라’며 결백을 호소했을 만큼 정신적으로 심란한 상태였다는 것을 알았지만 목숨을 끊을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많이 마주치진 않지만 최근까지 시청 내에서 보면 항상 다정하게 인사를 해줬다”며 “마치 오 시장이 모든 비리의 중심에 있는 것처럼 비춰지자 자살이라는 선택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유족 “고인 결백 믿는다”
 
오 시장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필해왔던 김진일 비서실장의 의견도 마찬가지다. 그는 오 시장이 자살하기 이전까지 죽음과 관련한 어떠한 낌새도 느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김 비서실장은 “오 시장은 양산시와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온 몸을 다 바친 사람이”이라며 “그는 시장으로서의 열정과 능력을 높게 평가 받았고, 직원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아온 사람이다. 갑작스런 자살 정황으로 미뤄보아, 내색은 안했지만 비리혐의를 받아오는 동안 맘고생이 컸다고 생각한다. 아마 그 과정에서 큰 수치심을 느낀 모양”이라고 말했다. 김 비서장은 시청직원들의 상심도 크지만 유가족의 심정은 ‘참담’ 그 자체라며 더 이상 말 꺼내기를 거부했다.

유가족들에 의하면 오 시장은 자살 며칠 전부터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해 수면제 등을 먹고서야 겨우 잠들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오 시장의 동생 오모 씨는 “최근 형이 검찰수사와 관련해 심리적 압박감을 받아오긴 했지만 가족에게 심경을 고백한 적은 없다”며 “나도 형의 심정은 자세히 알지 못한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검찰에 소환되기 전 심경에 큰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형은 비리를 저지르지 않았으며 결백을 믿는다”고 전했다. 오 시장의 자살이유가 ‘심리적 압박감’ 때문일 것이라는 설명이다. 현재 유가족들은 언론과의 접촉을 최대한 피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동안 오 시장의 금품수수 의혹을 내사해 온 울산지검은 ‘난처하다’는 입장이다. 울산지검은 오 시장에 대한 수사 중단 여부는 추후 검토할 방침이라고 전했지만 공소 유지가 어려워 수사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울산지검 특수부의 한 차장검사는 “오 시장이 고인이 돼 더 이상 고인과 관련된 수사는 할 수 없게 됐다”며 “오 시장을 제외한 부동산 비리의혹 관련자들에 대한 진위여부는 여전히 수사 중이다. 그 과정에서 오 시장이 연루됐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수사 종결 후에 언론에 보도 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현재 오 시장이 자살한 배경은 검찰수사를 당하는 것에 대한 수치심, 결백을 증명하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단, 울산검찰이 앞으로 수사과정, 또는 결과에 따라 오 시장의 연루 사실을 밝혀낸다면 자살이유가 또 다른 양상으로 분석될 것이라고 예상된다.
강신찬 기자
noni-jjang@hanmail.net
<박스>
컷 / 고(故) 오근섭 양산시장 인생 역경 스토리
제목 / 자수성가한 입지전적인 인물

 지난 11월 27일 오근섭(62) 경남 양산시장이 자택에서 스스로 목을 매달아 목숨을 끊었다. 오 시장은 남다른 애국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양산시 발전을 위해 평생을 바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또 시청 내·외부적으로 능력과 열정을 겸비한 시장이라는 높은 평가를 받아온 만큼 오 시장의 자살소식은 모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가 될 정도로 큰 사회적 파장을 몰고 왔다.
오 시장은 대범하고 다정한 성격으로 대인관계가 원만했고 직원들에게는 존경을 받아왔다고 알려져 있다. 비록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긴 했지만, 그는 초등학교 졸업이라는 학력의 벽을 허물고 지방자치단체장이라는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의 인생은 ‘인생역전 드라마’를 연상케 한다.
양산 토박이인 오 시장은 1947년 경남 양산시 북부동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만 졸업한 뒤 생계를 위해 뛰어들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돈을 벌기 위해 구두닦이, 신문배달, 파출소 급사 등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억척스러운 청소년기를 보냈다.
오 시장은 20대 초반 양곡도매업에 성공하며 이후 건설업, 운송업을 통해 자수성가 한 뒤 못 배운 한을 풀기위해 40대라는 젊은 나이로 양산대학을 설립하며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그는 1992년 14대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 양산군 후보로 출사표를 던졌고, 이후 1995년 시의원으로 당선되며 정치계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시의회 초대의장까지 거친 그는 1998년, 2002년 양산시장 선거에 도전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던 오 시장은 결국 2004년 보궐선거에서 4대 민선 양산시장에 당선됐다.
2년 동안 양산시를 이끌었던 그는 2006년 2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공천 과정에서 한나라당 의원 6명에게 서화를 선물한 일명 ‘서화 로비사건’이 불거져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오 시장은 한나라당을 탈당한 뒤 무소속으로 출마해 그해 5월 또 다시 양산시장으로 당선되는 이변을 연출하기도 했다.
당시 오 시장은 공식선거기간을 어기고 사전선거를 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지만, 벌금 90만원을 선고받아 시장직을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2007년 12월 오 시장은 다시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재임기간 동안 오 시장은 많은 기업들을 유치해 지역경제 활성화에 힘써왔으며, 특히 양산신도시에 부산대병원과 치의대 등을 유치해 지역발전에 큰 이바지를 해왔다.
또 오 시장은 지난해 2월 초등학교를 졸업한지 49년 만에 양산중학교 명예졸업장을 받았으며 올해 1월에는 효암고등학교에서, 2월에는 영산대학교 명예 행정학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앞선 2006년에는 부산대학교에서 명예 경영학박사 학위를 수여받기도 했다.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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