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그룹의 창업주. 윗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故이병철(삼성), 故정주영(현대), 故최종건(SK), 故구인회(LG), 신격호(롯데), 故박태준(포스코), 故조중훈(한진) 회장.

[민주신문=신상언 기자] 대한민국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10대 그룹은 상장사 시가총액(10월 기준) 약 1500조원 중 절반이 넘는 비중(778조원)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 재벌 기업은 설립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 동안 다사다난하고 흥미진진한 비화를 남겨왔다. 총수들의 고군분투와 명언을 남긴 사건들을 들여다보면 웬만한 드라마 못지않다. 10대 그룹의 탄생비화를 정리해봤다.

삼성-글로벌 기업 우뚝

세계 전자기기 산업을 이끌고 있는 글로벌 기업 삼성의 창업주 故 호암 이병철 회장이 처음 손 댄 사업은 정미업(1936년)이다. 

이병철 회장은 선친에게 받은 창업 자금을 바탕으로 두 명의 동업자와 함께 정미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 회장은 운수업과 땅 투기 사업으로 세를 확장했다. 은행에서 돈을 빌려 구매한 땅을 소작을 준 뒤 소작료를 받는 건 그야말로 노다지 사업 중 하나였고 이 회장은 200만평의 대토지를 소유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중일전쟁(1937년)이 터지면서 은행 대출이 중단되고 땅 값이 폭락하면서 사업은 곤두박질치고 만다.

실패를 맛 본 이 회장은 사업을 접고 중국여행을 갔다가 무역업에 관심을 갖게 된다. 당시 만주에는 사과와 건어물 등이 부족했고 거래 단위도 조선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컸다. 

이 회장은 무역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때 설립한 회사가 1938년 대구 서문시장에 자본금 3만원으로 차린 삼성상회다. 오늘날 삼성그룹의 모체가 되는 회사다. 삼성이라고 이름 지은 것은 ‘크고 강하고 영원하라’는 뜻이 담겼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 회장은 특유의 사업가 기질을 발휘해 무역업에서도 승승장구했고 1945년 서울로 상경해 ‘삼성물산공사’를 세웠다. 하지만 6.25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또다시 사업에서 쓴 맛을 봐야했고 부산으로 피난을 가게 된다. 

이곳에서 다른 사업을 물색하던 이병철 회장은 정부가 추진한 삼백산업 바람을 타고 설탕을 생산하면서 하루 25톤의 생산 규모를 갖추는 등 재기에 성공한다. 이후 제일모직과 비료공장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

승승장구하던 삼성에도 위기는 있었다. 삼성 계열사인 한국비료가 사카린 원료인 OTSA를 밀수했다는 의혹을 받은 것이다. 일명 ‘사카린 밀수사건(1966년)’이다. 이 사건으로 이 회장의 차남 이창희와 삼성 직원들이 구속됐으며 한국비료를 정부에 헌납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위기를 겪었으나 이병철 회장은 1969년 일본 산요전기와 합작해 삼성 산요전기를 설립한다. 현재 글로벌 초인류기업으로 거듭난 삼성전자의 시초가 되는 회사다. 이후 삼성전자는 1978년 흑백 TV 200만대를 생산해 일본 마쓰시다를 제치고 세계 최대 생산 기업으로 발돋움한다.

이후 이병철 회장의 3남인 이건희 회장이 후계자가 됐고 지금의 삼성을 있게 한 최대 전환점 중 하나인 ‘1993년 신경영 선포’가 발표된다. 이건희 회장이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야 한다”는 말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삼성은 국내에서는 1위 기업이었지만 세계시장에서는 별 볼일 없는 회사 취급을 받고 있었다. 이에 이건희 회장은 200여명의 임원진을 독일 프랑크푸르트 캠핀스키 호텔로 불러 경영혁신을 선언하고 체질부터 변화하기로 다짐한 것이다. 지금의 삼성이 초일류기업으로 성장한 계기이자 원동력이 된 사건으로 각인돼 있다.

현대-불도저 정신

재계 2위 현대자동차그룹의 창업주는 정치인으로도 잘 알려진 故 정주영 회장이다. 그는 단돈 47전을 가지고 가출해 대기업 총수가 된 것으로 유명하다. 정주영 회장은 18세가 되던 1933년 서울 미곡상인 복흥상회에 배달원으로 취직한다. 

이곳에서 꼬박 3년을 일한 뒤 싸전을 차리게 된다. 하지만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1939년 쌀 배급제가 실시됐고 정주영 회장의 싸전도 문을 닫아야 했다.

이후 정주영 회장은 자동차 수리공장을 세우고 조금씩 사업을 확장해 나갔지만 이번엔 태평양 전쟁(1941년) 발발로 자동차 공장을 잃게 된다. 하지만 해방 직후인 1946년 다시 한 번 자동차 수리공장인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한다. 

이듬해엔 ‘현대토건사’도 세운다. 건설업자들이 공사를 수주하고 받아가는 대금이 자동차 수리업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규모의 차이가 난다는 걸 알게 된 후였다.

1950년 1월 정 회장은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 공업사를 합병해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했다. 현대건설은 주로 미군 공사를 수주하면서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미군 병사 10만명의 숙소를 짓는 공사를 따내는가 하면 미 8군 전방 기지 사령부 본부 막사를 설치하는 공사까지 도맡았다. 당시 현대건설은 국내 5대 건설사로 손꼽히며 승승장구했다.

현대는 사세가 확장되면서 현대조선소를 세운다. 이 때 영국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오는데 유명한 일화가 있다. 1971년 정주영 회장은 조선소를 세울 차관을 들여오기 위해 영국 런던의 롱바톰 A&P 애플도어 회장을 만났다. 

애플도어 회장을 대면한 정주영은 뜬금없이 당시에 사용하던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든다. 지폐에는 거북선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데 정 회장은 “우리는 영국보다 앞선 300년 전인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었다. 단지 쇄국정책으로 산업화가 늦었을 뿐 잠재력은 그대로 갖고 있다”고 패기 있게 말하며 차관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냈다.

또 조선소가 들어설 황량한 백사장 사진 한 장을 들고 다니며 그리스 거물 해운업자 리바노스를 만나 26만톤짜리 배 두 척의 주문을 받아낸 일화도 유명하다. 

정 회장의 이러한 고군분투는 당시 세계 조선 시장 점유율이 1%에도 미치지 못하던 우리나라가 세계 조선 최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됐다.

SK-통신을 잡다

SK의 시작은 선경직물이다. 선경직물은 창업주 故 최종건 회장과 그의 동생인 故 최종현 회장이 함께 키워낸 기업이다. 창업주 최종건은 1944년 당시 일본인이 운영하던 선경직물에 취직한다. 하지만 6.25한국전쟁으로 회사가 폐허가 되고 최종건은 회사를 재건하기로 한다. 

이후 선경직물은 ‘닭표 안감’, ‘봉황새 이불감’ 등을 생산해내며 승승장구한다. 대한민국 최초로 홍콩에 직물을 수출하기도 했다.

1970년대 들어 최종건 회장은 석유사업으로의 확장을 계획한다. 그러나 1973년 폐암으로 별세하고 동생인 최종현 회장이 모든 경영권을 승계 받는다. 석유사업은 훗날 SK에너지가 된다.

현재 SK그룹의 주력사업인 통신사업의 시작은 199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황금알을 낳는 사업으로 인식된 이동통신 사업에는 포항제철(포스코), 코오롱, 쌍용 등 쟁쟁한 기업들이 경쟁 입찰을 했다. 

선경그룹이 입찰을 따냈지만 최종현 회장의 장남 태원(현 회장)씨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 노소영씨와 결혼하면서 각종 특혜논란에 시달렸다. 입찰을 따 낸 배경에 권력이 작용했다는 의혹이었다.

이에 선경측은 사업권을 반납했고 김영삼 정부 들어 민영화된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하면서 본격적으로 통신업을 시작하게 된다. 한국이동통신은 SK텔레콤의 모체가 되는 기업이다. 1994년 ‘011’ 상용화에 성공하면서 지금까지 통신업계 1위를 이어오고 있다.

선경그룹은 1998년 이름을 SK그룹으로 변경했고 그 해 2대 회장인 최종현 회장이 별세, 최종현 회장의 장남 최태원 회장이 경영권을 승계했다. 

최종건 창업주의 장남 최윤원 회장은 SK케미칼, 차남 최신원 회장은 SK네트웍스, 3남 최창원 회장은 SK가스를 이끌어왔다. 최종현 회장의 차남 최재원 회장은 SK E&S 대표이사 부회장을 맡고 있다.

포스코-황무지 신화

포스코그룹의 탄생은 故 박태준 회장을 빼 놓고는 논할 수 없다. 박태준은 1948년 육군사관학교(6기)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한 뒤 6·25전쟁에 참전했다. 

박태준은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뒤 1964년 대한중석(지금의 대구텍) 사장을 지냈다. 대한중석은 1934년 세워진 중석 생산업체로 영국 런던과 일본 도쿄에 지사를 세우는 등 잘나가던 회사였다.

이후 1968년 대한중석과 정부의 합작투자(정부 75%, 대한중석 25%)로 포항종합제철(현 포스코그룹)이 창립됐다. 자본금 4억원의 국영기업으로 출발한 포항제철은 세계 최고의 철강기업으로 변모했다.

하지만 박태준의 노력 없이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성과였다. 설립 초기 포항제철은 자금난에 시달려야만 했다. 제철소의 설립이 결정된 뒤 제철소 건설을 위한 자금을 유치해야 했다. 

이에 국제제철차관단(KISA)에서 자금을 지원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으나 한국에 들어서는 제철업이 경제성이 없다는 여론이 형성되면서 난항을 겪었다.

이때 박태준은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낸다. 당시 8000만 달러 정도 남아있던 대일청구권 자금을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이 지급하기로 한 대일청구권 자금 중 농림수산 분야 자금을 제철소 건설 자금으로 변경하자는 것이다. 

박태준은 즉각 일본으로 날아가 일본의 내각 인사들을 집요하게 설득했고 일본의 지원 결정을 받아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포항제철은 무사히 건설될 수 있었고 이후 한국 중공업 산업의 상징적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LG-동업 정신

LG그룹의 창업주 故 구인회 회장은 1931년 진주에서 ‘구인회 포목상점’을 개점했다. 특이한 점은 당시 포목점 사업을 하면서 허씨 일가와 동업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구인회 회장의 사돈인 故 허만종씨가 사업 자금을 대면서 그의 아들인 故 허준구 회장과 구인회 회장이 락희화학공업을 출범(1947년)시켰다. 행운을 뜻하는 럭키를 한자 ‘즐거울 락(樂), 기쁠 희(喜)’로 표현해낸 이름이었다. 락희화학공업은 국민크림인 ‘럭키크림’을 성공시키며 사업을 번창시켜나갔다.

1958년에는 사세를 확장하기 위해 LG전자의 전신인 금성사를 설립해 전자산업에 뛰어들었다. 이후 선풍기, 냉장고, 흑백 텔레비전, 에어컨을 국내 최초로 생산했다. 이후 LG그룹은 반도상사, 금성 알프스전자, 금성계전 등을 설립하며 그룹으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갔다.

LG그룹은 특이하게도 3대에 걸쳐 60여년간 동업관계를 유지해오다 지난 2004년 동업관계를 청산하고 GS홀딩스를 출범시켰다. 

허창수 회장이 그룹의 대표로 추대됐다. 재계 순위 10위권은 아니지만 15위권의 LS그룹도 2003년 LG그룹에서 계열 분리된 후 2005년 사명을 LS그룹으로 바꿨다. 현재는 故 구태회 명예회장의 조카인 구자열 대표가 그룹을 이끌고 있다.

한화-한국의 노벨

한화그룹의 시작은 다이너마이트 사업이었다. 창업주 故 김종희 회장은 1952년 조선화학공판 입찰에 뛰어들면서 한국화약을 세웠다. 한화의 전신이다. 1957년 다이너마이트 국산화에 성공하면서 한국의 노벨로 불렸다.

한국화약에도 위기는 있었다. 1977년 한국화약의 화물 열차가 이리역에서 폭발사고를 낸 것이다. 호송원의 실수로 사고를 자초했으나 안전규정 등을 지키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사망자만 59명, 중상자 185명 등 1400여명이 피해를 봤고 한국화약은 엄청난 보상금을 내야만 했다.

한국화약이 지금의 거대기업으로 탈바꿈한 건 김승연 회장의 취임 이후다. 김승연 회장은 1981년 29세의 젊은 나이에 회장에 취임했지만 제2의 창업을 선언하며 금융·유통·레저 사업 등으로 확장을 이어갔다. 

1980년 당시 한국화약은 재계 7위로 껑충 뛰어오를 만큼 성장세가 대단했다. 1992년 한국화약의 약칭 ‘한화’로 사명을 정식 변경했다.

한화와 빙그레는 형제기업이다. 김승연 회장이 그룹 경영권을 승계하면서 그의 동생 김호연 회장과 재산권 분할을 두고 마찰이 있었다. 

1993년부터 30여 차례 재판을 진행하며 분쟁을 벌이다 1996년 모든 분쟁이 일단락됐다. 이후 빙그레는 한화그룹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게 됐다.

한진-하늘과 땅, 바다

한진그룹의 창업주 故 조중훈 회장은 20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화물선을 타다가 귀국한 뒤 1942년 ‘이연공업사’를 차렸다. 트럭엔진을 수리하는 회사였다. 

이후 1945년 한진그룹의 모태가 되는 ‘한진상사’를 설립했다. 창업 당시 트럭이 한 대 뿐일 만큼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창업 5년째 되던 해에는 종업원이 40명까지 늘어나고 화물 운반선도 10척이나 보유한 운송전문회사로 성장하게 된다.

한진 상사는 주로 미국과의 수송 업무를 담당하며 성장하다가 1961년 한국 최초로 좌석버스 사업을 시작했다. 한진고속의 시초다.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요청으로 항공사업으로 영역을 확장했고 1977년 한진해운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하늘과 땅, 바다를 잇는 운송 기업으로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이후 1999년 장남 조양호 회장이 경영권을 승계 받아 지금까지 한진그룹을 이끌고 있다.

롯데-일본에서 한국으로

롯데는 1948년 신격호 회장이 일본에서 설립한 회사다. 주로 껌을 제조·판매하던 회사였다. 일본에서 사업을 확장하던 신 전 회장은 1967년 한국에서 롯데제과를 설립하게 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신 전 회장에게 외국 자본 유치를 위해 모국인 대한민국에 투자를 부탁했기 때문이다. 롯데라는 이름은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장 인물인 샤롯데(charlotte)에서 따온 것이다.

롯데가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성장하게 된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쇳가루 파동(1970년)’ 이후다. 국내 1위였던 롯데껌에서 쇳가루가 나오면서 위기에 빠졌으나 정부의 호텔 사업 제안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당시 서울 소공동에 있던 반도호텔을 34층으로 증축하는 사업을 하면서 위기를 타개했을 뿐만 아니라 롯데가 제과를 넘어 다양한 영역으로 뻗어나가는 계기가 됐다. 이후 롯데는 재계 순위 5위까지 오르기도 하는 등 한동안 성장세를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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