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영 전 한진해운 회장이 9월27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의 해양수산부에 대한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해 위원 질의에 답변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민주신문=신상언 기자]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는 옛말은 대한민국의 재벌을 빗대어 생겨난 말일까. 그동안 한보와 쌍용, 대우그룹 등 대한민국을 떠받치던 굴지의 대기업이 쓰러져갔다. 그때마다 경제가 휘청거렸고, 국민 혈세가 아낌없이 투입됐다. 상식적이라면 오너 일가 역시 재산을 모두 잃고 빈곤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호의호식한다는 소식만 들려올 뿐이다. 이같은 호화생활은 오너 개인뿐만 아니라 2세, 3세로 이어지니 그야말로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거뜬하다는 옛말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호의호식이 오너일가가 자행한 온갖 부정부패의 결과물이란 점이다. 엄청난 부채와 국민 혈세가 투입된 공적자금, 체납된 세금 등은 무시한 채 뒷돈을 빼돌려 자기 살길만 모색했다는 의혹이 끊이질 않는다.

최은영 전 한진해운 사장은 지난달 27일 해양수산부 국정감사에서 무릎을 꿇고 흐느끼며 대국민 사죄를 했다. 한진해운 사태에 책임을 지라며 사재를 출연하란 말에 극단적 조치를 취한 것. 국민들은 ‘기업은 망했지만 자기 재산은 절대 내놓을 수 없다는 것 아니냐’며 분노했다.

최은영 전 사장의 이런 행동은 그동안 자행돼온 재벌 오너들의 행태에 비하면 약과다. 실제로 수많은 재벌 오너들은 부도가 난 와중에도 온갖 수단을 가리지 않고 재산을 빼돌렸고 그들의 후손들은 여전히 ‘부자’라 불리며 살아가고 있다.

쌍용…3세도 거뜬

부자가 망해도 정말 손자인 3세까지 거뜬한 기업이 바로 쌍용그룹이다. 1995년 기준 매출 15조원을 자랑하며 승승장구하던 쌍용그룹은 자동차 산업으로 인해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코란도, 무쏘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차들을 생산하며 호황을 누렸지만 현대, 기아차의 아성에 추락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1998년 1월, 1조7000여억원의 부채를 떠안은 채 대우그룹에 매각됐다.

그러나 김석원(72) 전 회장의 부인 박문순(63)씨는 현재 성곡미술관장을 맡고 있다. 또 김 전 회장의 장남 김지용씨는 고속도로 휴게소 운영권을 갖고 있는 태아산업의 최대주주다. 태아산업의 지난해 자산규모는 190억원, 매출액은 380억원이다.

지용씨는 이 회사 주식의 34%를 가지고 있다. 그의 동생 지명, 지태씨도 이 회사 주식 24.9%를 각각 소유하고 있다. 아버지의 회사가 부도났지만 2세들은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세들도 마찬가지다. 김석원 전 회장의 동생인 김석준 쌍용건설 회장의 아들 김지운씨는 최근 스타 셰프, 엄친아 콘셉트로 방송에 등장하기도 했다. 해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이태원 등지에 여러 개의 레스토랑을 운영 중이라고 한다. 그는 쌍용그룹의 창업주 故김성곤 회장의 손자다.

대우…끄떡없다

대우그룹은 몰락한 대표적 기업으로 손꼽힌다. 한때 재계 서열 2위에 올랐던 대우그룹은 무리한 해외 투자로 위기를 자초했다. 11조원에 달하는 해외 투자로 내부 구조가 취약해졌지만 차입금을 늘려나갔다.

이로 인해 1998년 계열사를 감축하는 구조조정을 단행했지만 GM, 삼성자동차와의 협상에서 실패하면서 1999년 워크아웃을 맞게 된다. 대우는 2000년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대우인터네셔널은 포스코에, 대우종합기계는 두산 계열에 편입되는 등 이리저리 찢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김우중 전 회장의 일가족은 여전히 건재하다. 부인인 정희자씨는 아트선재센터 관장을 맡고 있다. 또 아도니스CC라는 골프장의 최대주주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아도니스가 공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매출은 140여억원이며 주식의 82.5%를 ‘정희자외 특수관계인’이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김 전 회장의 외동딸 김선정씨는 김상범 이수그룹 회장의 아내이며 이수화학 지분의 3.8%를 보유하고 있다.

기아…CEO만 몰락?

기아자동차의 시초는 1944년 설립된 경성정공이다. 경성정공은 자동차가 아닌 자전거를 만드는 회사였다. 故김철호 창업주는 경성정공을 자동차 회사인 기아산업으로 발전시켰고 1973년 그의 장남인 김상문씨가 경영을 이어받아 그룹을 키웠다.

이후 김선홍 회장 체제로 전환한 뒤 봉고, 프라이드 등을 히트시키며 승승장구했지만 IMF의 여파로 1998년 현대차에 합병됐다.

합병 직후 김선홍 전 회장은 부실계열사 지급보증과 회사 공금횡령 혐의 등으로 4년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모든 재산은 압류됐고 아들 명의의 아파트만 덩그러니 남아 그곳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다.

기아그룹은 앞선 사례와 달리 부자가 3대를 이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김선홍 전 회장은 엄밀히 말하면 재벌일가가 아닌 평사원 출신 CEO다.

김선홍 전 회장 이전에 기아를 이끌던 故김철호 회장의 장남 김상문씨가 진짜 재벌일가다. 현재 김상문씨의 아들, 즉 故김철호 회장의 손자 김석환씨는 기아산업에서 분리돼 나온 삼천리자전거의 대표다.

재밌는 건 故김철호 회장의 외손자인 배석두씨도 자동차 부품제조사 서진산업의 대표라는 점이다. 지난해 기준 서진산업의 자산규모는 4500억원에 달했다. 故김철호 회장의 친손자, 외손자 모두 회사를 경영하는 CEO인 것. 기아그룹의 부도 후 평사원 출신 CEO만 몰락하고, 본래 기아그룹의 일가였던 자손들은 여전히 부유하게 잘 살고 있었던 것이다.

왼쪽부터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정희자 아트선재센터 관장,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 박문순 성곡미술관장.

체납왕 ‘한보그룹’

IMF 외환위기의 시발점이 됐던 한보그룹의 창립자는 정태수(93) 전 한보그룹 회장이다. 1997년 1월 최종 부도를 맞이하긴 했지만 한때 재계 서열 24위까지 치솟았던 이 기업 오너는 전직 세무공무원 출신이다.

그는 말단 공무원부터 시작해 거대 기업의 오너가 된 그야말로 자수성가의 대표적 인물이다. 정 전 회장은 20여년간의 공직생활을 그만두고 1974년 한보상사를 설립했다. 이후 건설업에 뛰어들어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은마타운을 세우며 기업을 키우기 시작했다.

세를 확장하던 한보그룹은 1986년을 기점으로 기울어지면서 정 회장은 로비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강남구 수서-대치 지역에 개발제한구역 땅을 사들인 뒤 로비를 통해 땅을 택지로 바꿨다. 하지만 1991년 수서비리사건이 불거지면서 정 전 회장은 구속됐다.

정 전 회장은 석방 후 제철소 건립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투자금이 당초 예상액인 2조2800억원보다 두 배나 많은 5조7000억원으로 불어나면서 적자경영에 시달렸다. 이에 금융기관들이 일제히 대출금 회수에 나서면서 1997년 1월 한보그룹은 부도 처리됐다.

한보그룹 부도 후 정 전 회장은 공금횡령 및 뇌물수수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가 5년5개월을 복역한 뒤 석방됐다. 그러나 2005년 강릉영동대학 교비 72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재판을 받던 중 신병 치료를 이유로 일본으로 건너간 뒤 아직까지 해외 도피 중이다.

앞서 부자는 망해도 삼대는 간다는 말처럼 정 전 회장의 2세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했다. 차남 정원근씨는 한보그룹이 부도 직전의 상황이던 1996년 6월경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도박을 벌인 혐의로 기소된 적이 있다. 삼남 정보근씨도 정 전 회장이 1980년대 설립해 놓은 학교법인 정수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또 국세청이 적발한 이들 오너 일가의 땅은 시가 1500억원 이상이다. 더구나 16일 현재 국세청이 공개한 고액·상습 체납자명단에서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은 체납액 2225억원으로 1위를 달리고 있다.

참여연대 소속 김성진 변호사는 “기업이 경영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회사를 이용해 뒷돈을 빼돌리는 건 분명 올바른 행위는 아니다”며 “2세, 3세에게 계열사나 주식이 합법적으로 승계됐다면 아버지의 회사가 부도가 나도 자식들에게 함부로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경우도 생긴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런 행태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국가기관이 지분 승계 구조, 방법 등 법적 사항을 꼼꼼히 따져본 뒤 위법사항이 있으면 처벌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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