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혈서’로도 친일 조건 충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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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친일인명사전이 8년간의 집필 끝에 발간됐다. 예상대로 친일인명사전을 둘러싼 논란이 만만치 않다. “한국 국민이라면, 친일여부를 가려내는 것이 당연한대 왜 ‘정치적 의도’나 ‘정통성 훼손’등의 말이 나오는 지 이해할 수 없다”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입장과는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 서울 방배동에 위치해 있는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의 자택에서 친일인명사전에 대한 그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 8년간의 집필과정에서 고생이 많다고 들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설립할 때부터 하나도 쉬운 게 없었다. 친일인명사전을 만들자는 계획, 그리고 계획을 수립한 뒤의 과정, 연구진이 모이는 것, 원고를 작성하는 것 등 모든 과정이 힘들었다. 특히 운영, 즉 예산확보 문제는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다.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해 도중에 하차하는 직원들도 많았다. 그런데 이런 힘든 과정을 거쳐 왔음에도 사전이 발간된 뒤에도 어려움은 가시지 않고 있다. 일부언론과 시민단체 등의 터무니없는 모략과 비난이 심하다. 제발 이 사전이 국민들의 손에 널리 알려져 올바른 평가를 받길 바란다.” 
 
- 협박, 비난이 어느 정도였나.

“사전을 만든다는 소문이 퍼질 때부터 방해가 있어왔다. 보수시민단체들은 연구소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욕설 전화는 보통이다. 심지어 예산을 깎는다는 압력도 있었다. 이러니 예정발간일보다 1년 3개월가량이 늦어지게 된 것이다. 지난 8일 사전을 발간한다는 보고대회를 가진 뒤부터는 일부 언론과 시민단체들이 직·간접적인 비난, 협박 등의 내용으로 연구소에 전화를 하고 있다. 각종 법률적인 소송, 이의 제기, 발행금지 가처분 신청 등의 문제가 끊이질 않고 있다. 그때 느꼈다. ‘이래서 사전이 못나왔구나, 친일파 청산이 안 되었구나’하는 생각들 말이다. 만사 ‘교훈’이다. 이런 일들이 끊이질 않으니 ‘지금이라도 사전 잘 만들었다’, ‘안냈으면 큰일 날 뻔 했다’, ‘만약 친일파 세력들이 집권하면 나라가 어떻게 됐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됐다. 현재까지 우리는 어떤 법률적 소송에서도 진적이 없다. 계속 승소해 나가며 우리 연구소는 민주주의라는 기본적인 원칙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느꼈다.” 
 
- 국민성금 모금 캠페인에서 불과 10일 만에 7억원 가량의 성금이 모였다. 국민 참여의 원 동력과 이것을 지켜보는 과정에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그것이 원래 우리나라 국민들의 마음이다. 이데올로기나 지휘고하, 신앙, 성별, 빈부격차에 관계없이 자신의 민족과 나라를 빼앗겼다면 되찾고자 하는 마음은 인간이라면 아주 상식적인 차원의 문제다. 나라를 빼앗겼는데 나라 편을 안 들고 오히려 적국의 편을 들며 민족 역사에 해악을 끼쳤다고 한다면, 이것은 당연히 청산해 될 문제다. 국민성금 모금 캠페인을 벌였을 때 국민들이 열렬히 호응해 준 것은 결국 우리나라의 저력, 국민들의 올바른 정서이자 본래 모습인 것이다. 일본이 총칼로 우리나라를 통치할 때 이것을 반대한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이 여전히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흐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 지금에 와서 친일여부를 따져 단죄하자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나.

“그럼 영원히 안 밝히는 게 타당한가. 100년이 지난 뒤에라도 밝혀져야 한다. 임진왜란에 대해서는 왜 지금도 연구하나. 친일파 인사를 연구하는 것은 ‘역사의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다. 결국 책을 펴낸 궁극적 이유이기도 하다.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평가가 결정된다. 만약 식민시대 대 자신의 이권(친일)만 취해 잘 살아왔다면,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르는 등의 문제가 발생한다. 요즘 문제가 되는 이원영 같은 경우가 같은 맥락에서 해석된다. 이원영은 뒤에서 독립운동 단체를 만들고, 자금을 지원해 주는 등의 활발한 활동을 했다. 적어도 사회지도급 인사라면 ‘내가 역사적 평가를 받는다’ 는 생각으로 역사에 어떻게 기록되고 기억될 것이냐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
 
- 11일 현재, 발간 4일이 지났다. 특정 보수언론 창업주와 고위간부 등을 의도적으로 노렸다는 정치적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다.

“반대하는 사람들의 대체적인 논리는 ‘정치적의도가 무엇이냐’며 따지고 드는 것이다. 일제시대 때 앞잡이 역할을 했냐, 안했냐를 따지자는 것인데 정치적 의도라는 말이 왜 나오는지 모르겠다. 만약 사전을 편찬한 이유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우익세력을 깎아 내리는 것이 목표라도 생각한다면, 우익이 친일파라는 걸 스스로 자인하는 꼴이 된다. 우리는 이데올로기를 생각하며 사전을 쓴 적이 없다. 나라를 찾는데 우익, 좌익이 어디 있겠나.
만약 그들의 생각대로 정치적으로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했다면 힘든 연구를 하며 사전을 냈겠는가. 차라리 정치사 연구를 하거나 정치적 활동을 했겠다. 좌익은 친일해도 괜찮고 우익은 안 되고, 반대로 우익은 친일해도 넘어가고 좌익은 안 넘어간다는 식의 논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 연구소는 사전의 어떤 페이지, 어떤 내용에도 이런 가치를 적용한 적이 없다. 단지 일제강점기 시대에 친일행각을 했던 사람들, 그 자체만 연구할 뿐이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을 친일인명사전에 올린 것에 대한 논란이 심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친일명단에 올려놓았다는 것을 문제 삼는 세력이 있다. 한편에선 ‘만약 박 전 대통령이 혈서를 썼는데 일제당국에서 안 받아들여져서 사관학교에 안갔다. 그럼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 것이냐’라는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연구소 생각에 박 전 대통령 본인이 사관학교에 가고 안 가고는 두 번째 문제다. 혈서자체를 썼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친일인명사전에 들어가야 된다. 보통 사람들이 살면서 혈서를 써볼 기회가 얼마나 있겠나. 혈서를 써본 사람이 몇이나 있겠나. 즉 혈서를 쓸 정도로 천황정신에 따라 올바른 일본국민이 되고자 했던 각오였다고 판단한다. 이 하나만으로 사전에 오를 충분한 조건이 된다. 이 문제는 더 이상 논의 안했으면 한다. 그럼 대체 누가 사전에 들어가야 되는가.”
 
- 혈서논란으로 박근혜 전 대표가 곤혹스러워 할 것이다. 반발하거나 입장을 밝히지 못하는 등 이러지 저러지도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친일을 한 사람이 대통령을 했는데 그 후손이 무슨 지장이 있는가. 이런대 연고를 적용시키면 안 된다. 우리는 어떤 정파에도 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파를 초월한 단체다. 누가 집권을 하느냐를 고려해서 사전을 만든 게 아니다. 누군가의 정치적 피해와 이득에 상관없이 친일행적을 일삼은 인물을 사전에 올려 역사에 남기면 되는 것이 우리의 작업이다.”
 
- 반민특위 688명, 광복회 692명, 그런데 그때보다 6배나 많은 인물들이 실렸다. 어떻게 조사한 것인가.

“우리의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명단이 250만 건이다. 아직도 미확인 된 사람들도 상당수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의 자료나, 혹은 증인들의 죽음으로 확인할 수 없는 사람들을 줄이고 줄여서 4,300여명의 명단이 나왔다. 혹자들은 다른 기관과 비교해서 왜 이렇게 많은 명단이 나왔냐 하는데, 친일파 청산은 다른 선진국들처럼 전쟁이 끝나고 독립 뒤 바로 했었어야 했다. 만약 그렇게 됐다면 지금 우리가 사전에 올려놓은 명단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나왔을 것이다. 반민특위도 중간에 조직이 와해만 되지 않았다면 2차, 3차 조사를 통해 더 많은 친일행적들을 밝혀냈을 것이다. 다른 기관과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또 우리가 그만큼 면밀히 조사했다는 것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 국립 유공자 20명도 친일행각이 드러났다.

“문제점이 있다. 왜냐하면 독립유공자 등 예우 및 법률이 만들어진 1984년 당시에는 친일을 선정하는데 있어 ‘이것저것’ 다 빼버려 올바르게 가려낼 수 없는 ‘누더기법’이 적용돼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심의위원들은 당시의 심의기준에 맞게 국가유공자를 선정했다. 그 과정에서 통과된 것이다. ‘누더기 법’에 의해서 말이다. 그러나 역사학문이라는 것은 점점 발전한다. 계속해서 새로운 자료가 나오고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니 우리 연구소 측에서는 사전을 만들 때 정부기관 기준에서 ‘흐물흐물’한 법안으로 빼놨던 사람들을 올려놨을 뿐이다.
 
-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온 인물 중에 좌익 쪽 인사에는 관대했고, 우익 쪽 인사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말이 있다.

“일고의 여지도 없다. 책도 안보고 한말이기 때문에 대응할 가치도 없다. 1905년을 전후한 시기부터 1945년까지 40년, 약 반세기동안 일제치하에 있었던 친일행위만 읽혀져야 한다. 그때 일본은 어떤 이데올로기적인 편견에 관계없이, 또 자기 세력을 만드는데 좌익, 우익을 가리지 않았다. 우리가 사전 만들 때도 어느 한쪽을 빼놓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전을 한번 검토해보길 바란다. 만약 구체적으로 예시해서 어느 한 이데올로기에 치우쳤다는 증거를 대면 우리가 얼마든지 반론을 제기 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전혀 몰랐던 새로운 자료를 내놓는다면 사전에 추가 할 수도 있다. 우리가 사전을 만드는데 150여명의 학자들이 집필했다. 최대의 과제는 ‘공정’이었다. 공정의 기준은 친일행위를 했느냐, 안했느냐 이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
 
- 앞으로의 행보는 어떻게 되는가.

“내 전공은 문학이기 때문에 한국문학사를 쓰는 등의 작품 활동에 전념할 것이다. 내년부터 더욱 바빠질 것으로 보인다. 민족문제연구소로서는 인명사전과 관련된 도서들을 계속해서 발간할 것이다. 이번 친일인명사전이 친일파들의 이름 정도만 올라온 사전이라면 내년부터는 더 자세한 내용이 들어가 있는 책들을 만들 예정이다. 총 20권 정도가 될 듯 하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언론인들이 오히려 언론의 소중함을 모르는 것 같다. 국민들에게 널리 읽히고 있는 대다수의 신문들과 매체들이 친일인명사전이 나왔을 때 ‘논란’, 또는 ‘논란이 일듯’ 등과 같은 방법으로 제목을 단다. 싸움 붙일 게 따로 있지, 우리나라에서 친일인명사전을 만드는데 왜 논란이 되어야 하나. 더 이상 이런 식의 싸움붙이기는 지양해줬으면 좋겠다.”
강신찬 기자
noni-jj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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