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 검사만이 ‘진실’ 말한다


“적절하지 못한 이슈로 심려를 끼쳐드려서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죄송하게 생각한다.” 결국 이만의 환경부장관이 고개를 숙였다. 친자확인 청구 소송으로 논란이 불거진 지 하루 만이다. 하지만 이 장관은 혼외 자녀 존재 여부에 대해선 완강하게 부정했다. 총각 시절 부적절한 일은 있었으나 소송을 제기한 35세의 재미교포 여성이 자신의 사생아라는 점에선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 이 장관이 항소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때문에 소송은 2심으로 넘어가면서 새 국면을 맞게됐다. 이 장관은 그동안 거절해오던 유전자 검사에도 적극 응해 억울한 누명을 벗겠다는 각오다. 이 장관의 혼외 가족으로 주장하는 모녀 역시 물러서지 않을 태세다. 진실게임 양상으로 치닫고 있는 사건의 전말을 밝힌다.


이만의 “35년 전 총각시절 연애얘기, 사실과 달라 항소 준비”

옛 애인 “어렵게 키운 딸아이 호적에 등재하고, 양육비 달라”


비극은 지금으로부터 38년 전, 두 남녀의 만남에서 비롯됐다. 주인공은 1971년 당시 수습 사무관이던 25세의 젊은 이만의 장관과 18세 다방 여종업원 진모씨다. 진씨가 일하던 서울 종로 금강산 다방에 이 장관이 놓고 간 서류봉투를 돌려주면서 두 사람은 처음 만났다. 봉투를 돌려 받은 그 날 이후 이 장관은 다방과 진씨의 금호동 자취방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74년 11월경 진씨는 이 장관의 아이를 임신하게 됐다. 진씨 본인조차도 그 사실을 모르고 지내다 임신 5개월만에 알게된 게 실수였다. 이 장관은 진씨의 임신 소식에 탐탁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하겠냐’고 묻는 진씨에게 이 장관은 ‘여자들이 알아서 할 일이니까, 당신이 알아서 해라’라고 말했을 뿐이다.


“출세하면 아이 보살피겠다”


그 후 이 장관은 진씨에게 발길을 끊더니 진씨가 임신 8개월에 접어든 1975년 6월 지금의 부인과 결혼했다. 바로 다음달 7월22일 금호동에 있는 산부인과에서 진씨는 딸 은정씨를 낳고, 이 장관을 혼인 빙자 간음죄로 고소했다. 이에 이 장관과 그의 부인은 진씨가 살던 금호동을 찾아 용서를 구했다.

진씨는 거절했지만, 그 해 11월경 마음을 돌리고 고소를 취하했다. 담당 검사가 이 장관과 합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던 것. 이날 진씨는 이 장관으로부터 ‘출세하면 아이를 보살피겠다’는 약속과 위자료 명목으로 50만원을 받고 헤어졌다.

그 후 두 사람은 진씨가 1984년 4월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 전까지 10여년 동안 만나지 않았다. 그리고 24년의 시간이 흘렀다. 무정한 세월 앞에서 어느덧 30대 중반에 놓인 진씨의 딸 은정씨가 우연히 이 장관의 모습을 발견했다. 지난해 2월 국회 인사청문회를 치르고 있는 이 장관을 인터넷을 통해 보게 된 것. 이날 이후 은정씨는 속상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버지인 이 장관은 출세가도를 달리는 반면 정작 자신의 곁을 지켜준 어머니는 고생만 했다는 사실이 은정씨를 안타깝게 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는 진씨의 마음 역시 편치 않았다. 더욱이 딸이 아버지를 보고 싶어한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은정씨가 성장하는 동안 진씨는 줄곧 ‘엄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아버지를 찾아가라’고 말해왔던 터였다. 어차피 한번은 만나야 할 사람이라면, 이제는 딸이 아버지를 만나게 해야 할 때가 왔다고 진씨는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두 남녀가 다시 만났다. 지난해 7월12일, 이 장관과 진씨는 광화문 흥국생명 빌딩 지하 바에서 해후를 이뤘다. 이 자리에서 이 장관은 진씨에게 제안을 하나 했다. 은정씨를 안 만나고, 법적으로 가지 않으면서 다른 방법으로 보상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물음이었다.

진씨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대신 은정씨를 가르치기 위해 진 빚의 절반을 갚아달라는 조건을 내세웠다. “양심껏 주면 된다”는 게 진씨의 설명이었다. 이에 이 장관도 납득한 듯 은행계좌를 알려달라고 했고, 모종의 계약은 그렇게 성사되는가 싶었다.

하지만 일주일만에 이 일은 ‘없던 얘기’로 백지화가 됐다. 강남에 위치한 인터컨티넨탈호텔 카페에서 만난 이 장관이 ‘자식이 딸이 아니라 아들인 줄로만 알았다’는 터무니없는 말을 하자 진씨는 ‘돈이고 무엇이고 다 필요 없으니 법정에서 보자’고 선언했다. 여기까지가 진씨가 <시사저널>을 통해 주장하는 일련의 과정들이다.


유전자 검사 거부로 의혹 ‘솔솔’


지난해 10월8일 이 장관을 상대로 제기된 친자확인 청구 소송은 1년여만에 판결이 내려졌다. 결과는 원고 은정씨의 승소였다. 서울가정법원은 지난 9월25일 ‘원고는 피고의 친생자임을 인지한다’고 판결했고, 이에 따라 이 장관은 패소하게 됐다.

판결문에 따르면 법원은 세 가지 근거를 적시하며 은정씨를 이 장관의 딸로 판단했다. 첫째, 이 장관과 진씨가 서로 만나 사귀는 과정에서 은정씨를 출산했다는 점. 둘째, 진씨가 이 장관을 혼인 빙자 간음죄로 고소한 적이 있었던 점. 셋째, 이 장관이 이번 소송에서 은정씨가 자신의 친생자가 아니라고 다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러 차례에 걸쳐 유전자 검사에 응하지 않았던 점이 ‘원고는 피고의 친생자가 명백하다’고 밝혔다. 재판부 일각에서는 이 장관이 법원의 유전자 검사를 위한 ‘검수명령’에 응하지 않은 게 판결에 가장 크게 작용했다고 전했다.

이 같은 법원 판결이 나오자 닷새후인 지난 9월30일 진씨는 환경부장관실로 내용증명서 한 통을 보냈다. 내용인즉, 재판 결과 은정씨가 이 장관의 친생자임이 확인되었으니 이 장관의 호적에 올릴 예정이라는 것. 덧붙여 그동안 은정씨를 어렵게 양육했기 때문에 양육비 청구 소송을 제기할 것이라는 진씨의 의도가 담겨졌다.

그러나 이 장관 역시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1심 판결에 불복하고 지난 10월19일 항소했다. 결과적으로 은정씨를 딸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 진씨의 주장이 상당 부분 사실과 다르다는 게 이 장관의 설명이다. 특히 혼인 빙자 간음죄로 고소당했다는 내용은 사실과 전혀 다를 뿐 아니라 이를 약점으로 공직에 있는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이 장관은 1심에서 하지 못한 유전자 검사를 2심에서 진행할 계획이다. 현직에 있는 공인으로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는 자각에서다.

이 장관의 한 측근도 이번 사건과 관련해 “이 장관이 결혼 전에 교제하던 여성의 딸로 알고 있지만 친자 여부가 불투명한 상태”라면서 “1심에서는 대응을 하지 않아 불리한 판결이 나온 만큼 2심에서는 좀더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이 장관은 유전자 검사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의혹을 사왔던 게 사실. 유전자 검사만 받으면 친자 여부가 확실히 가려질텐데 이를 피하는 것은 그 검사가 자신에게 불리하기 때문일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게 법조계의 지배적인 시각이다. 친자확인 소송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셈. 이 장관이 유전자 검사를 할 의향을 전한 만큼 2심에선 사건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질 전망이다.


‘사생활’ 부각으로 사퇴 거절


이 장관과 그의 옛 애인 진씨의 피할 수 없는 법정 공방이 예고되는 가운데 사건의 파문은 걷잡을 수없이 커졌다. 이 장관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전말이 진씨의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면서 정계는 물론 사회 전반의 이슈로 떠오른 것. 이 장관의 도덕성 추락은 말할 나위 없고 일각에서는 사퇴 촉구 분위기마저 감지되고 있다.

특히 이 장관의 경우 현정권 출범 때부터 지금까지 장관직을 유지할 정도로 이명박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는 만큼 야권의 질타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실제 이 장관은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정종환 국토해양부 장관과 함께 지난해 3월 취임 이후 현재까지 자리를 유지하며 명실상부 현정권의 실세로 이름을 올렸다.

이에 민주당 우상호 대변인은 “이 사건은 아침 드라마, 주말 드라마에 자주 나왔던 그러한 사안”이라면서 “자기의 친자식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생활비조차 대주지 않는 그런 모습에서 이것은 한 나라 공직자의 최고 반열에 있는 장관이 취할 태도가 아니다”라며 사퇴를 촉구했다.

사퇴 촉구는 야당뿐만이 아니다. 친이계로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진수희 의원 역시 “이 장관이 공직자가 되기 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이 일이 불거지고 난 뒤 대처한 방식은 공직자로서 적절하지 않았다”면서 “책임을 지는 쪽으로 결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궁지에 몰린 이 장관은 지난 18일 내년도 예산안 심의를 위한 국회 환경노동위 전체 회의에 참석한 공개 자리에서 해명의 시간을 가졌다. 이 장관은 “20대 총각시절에 있었던 부적절한 일”이라면서도 “‘비가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인생의 가르침처럼 그 뒤로 철저히 자기 관리를 함으로써 어느 공직자보다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해왔다”고 밝혔다.

결국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사퇴 촉구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한 셈이다. 35년 전 일이고, ‘사생활’의 영역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면서 장관직 수행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장관은 이어 “잡지에 보도된 것처럼 결론이 난 것이 아니다. 장관에 발탁되고 이 일이 나온 뒤 (원고 측에서) 물질적으로 요구를 했다”면서 “옳지 않은 일과 타협하고 넘어가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원칙적으로 임했다”고 항소 이유와 더불어 일련의 사건들이 사실이 아님을 재차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관은 “적절치 못한 이슈로 심려를 끼쳐드려서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도의적인 사과를 전했다.


뿔난 진씨 “법정에서 보자”


이 장관이 사건 진압에 진땀을 빼는 사이 진씨는 화가 많이 났다. 이 장관이 친자 부인과 항소한데에 “딸아이를 35년 동안 혼자 키운 것에 감사하다고는 못할망정 어떻게 항소할 수 있는가”라는 항변이 이어졌다. 진씨는 “딸아이를 조용히 호적에만 넣어줬어도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한편, 이 장관은 현 부인 사이에서 1남3녀를 두고 있다. 지난 3월27일 관보에 실린 정부공직자 재산등록 현황에 따르면 이 장관은 전남 담양군 일대의 토지와 본인 명의의 단독주택, 양천구 목동에 있는 아파트와 오피스텔 각 한 채씩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여기에 가족들의 예금 등을 포함해 총 17억4,700여만원의 재산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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