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영화인 납북 탈출기 ‘스크린 복원’

▲1960년대 한국 영화계를 주름잡던 영화감독 신상옥과 배우 최은희. 1978년 1월 홍콩으로 갔던 최은희가 사라지고 그를 찾아 떠난 신상옥 역시 같은해 7월 행방이 묘연해진다. 그리고 이들은 8년이 흐른 후 나타났다.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뒤흔들었던 미스터리 납치 스캔들이 영화화됐다.

[민주신문=김미화 기자]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북한의 독재자. 그는 한마디로 말해 ‘영화광’이다. 자신이 통치하는 나라의 영화 후진성이 내내 마음에 걸린다. 수준 높은 영화를 만들고 싶은데 인력이 없다. 전쟁까지 치른 적대적 이웃 국가에는 눈에 띄는 영화감독과 배우가 있다. 독재자는 그들을 데려와서 자국 영화를 진흥해야겠다고 마음 먹는다. 현대 국가라면 아무리 독재자라도 정중히 제안을 했을 것이다. 바라는 바와 조건을 내세워서. 하지만 왕조국가나 다름 없는 곳에서 왕세자 역할을 했던 독재자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마음에 둔 유명 감독과 배우를 납치한다. 이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20세기 후반 한반도에서 벌어진다. 영화감독 고 신상옥(1926∼2006)과 배우 최은희(89) 부부 납북 사건이다.

세기의 가십거리 신상옥-최은희 미스터리 납치 스캔들 전말 공개
자료사진·재현 장면 등 재구성, 김정일 예술로 체제 안정성 꾀해

지난 22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연인과 독재자(The Lovers and the Despot)’는 냉전 시절 자유진영을 깜짝 놀라게 했던 부부 영화인 납북을 스크린에 복원한다. 신 감독과 그의 전 부인 최은희가 납치된 과정을 자료사진과 영화 화면, 재현 장면 등으로 재구성하며 기괴하고도 야만적이고 흥미로움으로 가득찬 사건의 진실을 전한다.

자진 입북설 등 뒷소문 진실

신 감독과 최은희가 1978년 1월과 7월 홍콩에서 6개월 간격으로 각각 납치를 당한 뒤 김정일을 만나고 북한 체제에 순응하는 척하며 영화를 만들다가 1984년 극적으로 서방으로 탈출하는 과정은 눈과 귀를 붙잡기에 충분하다.

최은희와 그의 아들과 딸, 최은희의 사촌동생, 미국 중앙정보부(CIA) 한국인 비밀요원, 프랑스와 일본 영화평론가 등의 증언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촘촘한 진실의 그물망을 짜낸다. 억측과 풍문이 만들어낸 두 사람 납치를 둘러싼 여러 오해가 무색해진다. 최은희가 핸드백에 몰래 숨긴 녹음기로 녹취한 김정일의 말들이 서늘한 기운을 전한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소재인데도 생동감이 넘치는 이유다.

영화는 김정일의 내면도 파악하려 한다. 거대한 집에서 장난감에 둘러싸인 채 외롭게 자라 영화에 푹 빠져버린 ‘고독한 왕자님’의 정신세계가 북한사회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도 분석한다. 신 감독과 최은희를 도약대 삼아 북한영화의 해외 진출을 꿈꾸고, 북한판 ‘타이타닉’까지 만들고자 했던 그는 국가경영자보다 억만장자 영화제작자의 풍모다. 최은희는 “신 감독이 북한에서 유일하게 좋은 점이 돈 걱정 없이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김정일은 신 감독과 최은희를 통해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싶어했다고 한다. 신 감독과 최은희가 몰래 녹음한 육성 테이프를 들어 보면, 김정일은 영화 촬영 혹은 국제 영화제 참가차 해외로 나가는 신 감독에게 특별한 지시를 내린다. 만나는 지인들에게 “북한은 남한과 달리 창작의 자유가 보장돼 있고, 그래서 원하는 영화를 마음껏 만들 수 있다”는 말을 하라고 말이다.

신 감독과 최은희가 북한에 납치를 당하고 몇 년 뒤 목숨을 걸고 탈출한 사건만 나열해도 영화가 구현할 수 있는 상상력을 능가한다. 하지만 ‘연인과 독재자’는 두 사람의 납치와 탈출을 둘러싼 가십성 폭로에 매달리지 않는다. 이 영화가 중점으로 다루고자 하는 이야기는 영화라는 예술 장르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굳건히 다지고 싶은 독재자, 그리고 그의 강권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 예술가 부부의 상충한 이해관계다.

두 사람이 다시 돌아온 이유

지금도 영화계에는 원로 영화인을 중심으로 신 감독의 자진 입북설이 떠돈다. 박정희 정권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다가 미운털이 박힌 신 감독이 새로운 영화 활동 공간으로 북한을 택했다는 것이다. 신 감독은 1974년 예고편 검열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신의 영화사 신필름이 허가 취소를 당해 납북되기 전 4년 동안 영화 연출을 하지 못했다. ‘연인과 독재자’는 김정일의 목소리를 통해 자진 입북설을 불식시킨다.

대한민국에서는 유신체제의 엄격한 영화 검열 제도로 자신이 가진 역량을 발휘할 수 없었던 비운의 천재 감독 신상옥. 그는 남한보다 더 억압된 체제에서 영화를 실컷 만들 수 있었고, 그에게만큼은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서 특별한 제약이 가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은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당시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던 주민들을 엄하게 벌할 정도로 타인에게 보이는 감정조차 연기해야 하는 공포 독재국가다.

김정일이 말하면 밥을 먹어야 하고, 그가 시키는 대로 옷을 입어야 하고, 그의 눈 밖에 나면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는 억압적인 환경에서는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좋은 영화가 나올 수 없는 법이다. 그곳에서 아무리 돈 걱정 없이 영화를 찍는다고 한들 진심으로 행복했을까.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가졌지만 억압의 시대 아래에서 자신들이 가진 예술혼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하고 분단국가의 희생양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야 했던 신 감독과 최은희. 그리고 북한의 영화 발전을 위해 많은 돈과 노력을 기울였지만, 영원히 이룰 수 없었던 김정일의 일장춘몽. 이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해 진정한 예술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 분위기에서만 나온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확인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의 감독이 영국인 로스 아담과 로버트 캐넌이라는 사실이다. 한국을 찾아 최은희를 2년 동안 만나고 설득하며 이 영화를 만들었다. 두 감독은 “이 스펙터클한 이야기가 왜 그동안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었다”고 한다. 아담과 캐넌은 신 감독의 연출작과 최은희 출연작 화면을 활용해 납치 당시와 납북 뒤 두 사람의 심정을 표현해내는 연출력으로 영화의 완성도를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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