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세는 사라지고 ‘돈’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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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심복’으로 불리던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85년 영욕의 삶을 마감했다.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유신 실세’의 별세 소식에 모든 언론은 이 전 부장의 영화 같은 ‘권력무상’의 삶과 비참한 말년생활에 초점을 맞춘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한 재미블로거가 이 전 부장 자녀들의 미국 부동산 소유 내역을 공개하면서 또 다른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전직 기자출신 재미교포 블로거 안치용 씨는 이 전 부장과 그의 아내 정윤희 씨 슬하에 있는 3남 1녀의 부동산소유 내역을 공개하고, 모든 자녀들의 소유한 부동산가격은 최대 5,000만 달러(한화 595억7,500만원)에 달할 것이라는 주장했다. 

지난달 31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심복으로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유신 실세’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관이 영욕의 생을 마감하고 향년 85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한 평생을 권력욕으로 살아온 이 전 부장을 수식하는 단어는 무수히 많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 중앙정보부 장관, 권력의 화신, 청산가리를 품고 북한에 찾아간 남북공동성명의 주역, 김대중 전 대통령을 납치한 주도자 등의 수식어는 그가 살아온 치열한 인생을 짧게나마 보여주는 대목이다.
 
부동산 관련서류만 1백건 이상
 
그러나 일부사람들에게 이 전 부장은 유신정권 시절 권력형 부정 축재자로 막대한 재산을 모은 인물로 기억되기도 한다. 이 재산을 물려받은 자녀들 간의 다툼은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재미교포 블로거라고 불리는 안치용 씨는 이 점에 주목했다. 이 전 부장이 세상을 등진 이후 대부분의 언론사가 ‘이후락, 영욕의 85년 삶’에 초점을 맞춘 기사를 내보낸 반면, 안씨는 이 전 부장의 자녀들이 물려받은 재산으로 해외에서 부동산을 매입하거나 매각한 내역들을 밝혀내기 시작한 것이다.

안씨는 자신의 블로그 ‘시크릿 오브 코리아’에서 “이후락의 별세에 대해 망자에 대한 예의를 갖춰야 하겠지만 대통령 비서실장, 중앙정보부장등을 지낸 간과할 수 없는 공인이며, 한국 현대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므로 엄정한 평가가 이뤄져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부동산 내역을 공개한다”며 “‘이후락 자녀들이 재벌 일가와 결혼, 재벌의 돈으로 미국의 부동산을 사는데 왈가왈부하는가’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 부분은 프레이저 청문회 등에서 이미 나왔듯이 스위스 비밀계좌와 일정부분 관련이 있고 ‘부정축재자’로 발표된 이후락의 돈과도 연관성이 있다는 의혹이 짙기 때문’이라며 당위성을 설명했다.

지난달 31일 안씨는 “이 전 부장의 자녀 등 직계가족들은 뉴저지주 알파인에 호화주택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뉴욕 맨해튼의 대형빌딩, 퀸즈의 빌딩, 최근에는 뉴저지주 엣지워터의 대지와 주택을 구입했다”고 전했다. 또 그는 해외에서 매입한 부동산가격은 최대 5,000만 달러(한화 약 595억7,500만원)에 달할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했다. 이 중 특히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인물은 외동딸과 그의 남편 J씨라고 설명했다.

안씨가 지난 9월 29일 미국 뉴저지 버겐카운티 등기소를 방문해 검색컴퓨터로 J 씨 명의의 부동산관련 서류를 조회한 결과 버겐카운티 단 한 지역에서만 관련 서류 103건이 검색됐다는 것이다.

안씨는 “부동산 매매계약서뿐 아니라 등기소에 제출된 매매관련 다른 부속서류를 포함한 것이지만 매매계약서(매입·매도 포함)만 40여건이었다”며 “이 전 부장의 장남 보다 외동딸 부부 재산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외동딸 부부의 부동산소유가 유독 많은 까닭은 이 전 부장이 중앙정보부장 시절 사위인 J 씨에게 부정축재 자금을 발송하여 관리하게 했기 때문이다. 1980년 신군부가 밝혀낸 이 전 부장의 부정축재 자금은 약 194억원. 외동딸 부부가 막대한 부동산을 소유하게 된 배경에는 이 전 부장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밝혀진 것은 일부분”
 
안씨가 자신의 블로그에 밝힌 바에 따르면 외동딸 부부는 최소한 1975년부터 미국에 체류하기 시작했으며, 첫 번째 부동산 매입은 같은 해 11월 3일 뉴저지주 테너플라이의 주택을 8만3,000달러에 구입하면서 시작됐다. 1980년 8월 5일에는 하와이 호눌룰루의 와이키키 해변과 인접해 있는 이라카이(IRAKAI)아파트 1426호를 매입했다. 이라카이아파트는 와이키키 서쪽해변에 위치한 10채의 콘도 중 해변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으며, 가장 먼저 세워진 건물이다. 매입가격은 당시로서는 큰돈인 34만2,000달러였다.

8년 뒤인 1987년 6월 10일에는 뉴욕 퀸즈의 대표적인 한인 타운인 플러싱 메인스트릿에 빌딩을 매입했다. 매입가격은 220만달러였다.

이들 부부는 법인을 설립하기도 했다. 외동딸 부부는 1987년 8월 24일 ‘MONDA ASSOCIA TES’ 라는 법인을 설립해 뉴욕 맨해튼 한복판의 빌딩을 매입했다. 매입가격은 무려 720만달러에 달했다.

이 전 부장의 외동딸 부부는 2002년 4월 2일 이 빌딩을 매도했는데, 당시 매도시 가격은 897만 5,000달러였다. 현재 시세가는 1,700만달로러 추산된다. 또 2007년 4월 13일에는 ‘MMGK LLC’ 라는 법인을 설립해 뉴저지주 에지워터의 땅을 구입했다. 이 땅의 매입가격은 무려 690만 달러였으며 양도세만 8만900여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안씨에 따르면 이 전 부장의 외동딸 부부가 현재 살고 있는 곳은 뉴저지 알파인에 위치해 있는 한 주택으로 대지는 약 2,400여평에 이른다. 이 땅은 2006년 당시 뉴저지 버겐카운티 정부가 고시한 공시가격만 378만1,900달러이며, 공시가격이 시세에 한참 못 미치는 점을 감안하면 현시세가 는 최소 600만 달러가 넘는다는 것이 안씨의 주장이다.

안씨는 “이들 부부는 이외에도 수십차례의 거래를 통해 주택과 빌딩을 사고팔았다. 부동산 소유의 일부분이 이 정도”라며 “이 전 부장의 큰 아들과 작은 아들도 미국에 부동산이 있다”고 말했다.

3명의 아들 중 가장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인물은 장남과  그의 아내. 이들 부부는 외동딸 부부와 같은 해인 1975년 첫 집을 구입했으며, 1980년에도 외동딸 부부와 같은 콘도인 하와이 호놀룰루 하이키키 해변에 인접한 이라카이아파트 1625호를 구입했다. 해변에서 가장 유명한 콘도 2채를 직계가족이 동시에 매입했던 것이다.

몇 년 전 이 전 부장의 장남이 작고한 뒤 S 씨는 2007년 3월 2일 뉴저지 테너플라이에 215만 달러의 집을 매입했다.

현재 안씨는 지난 9월 29일 뉴저지 버겐카운티 등기소에서 출력한 장남 부부와 외동딸 부부의 부동산 거래서류를 조회했으나 그 리스트의 양이 만만치 않아 목록만 가지고 있을 뿐 서류 확보는 잠시 미루고 있는 중이다. 그 절차가 까다롭고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안씨는 기자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이 전 부장 자녀들의 나머지 부동산거래 내역도 차차 공개해 나갈 것”이라며 “현재 확보한 계약서보다 실제 계약서는 몇 배나 많기 때문에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이후락 자녀들의 미국 부동산보유에 대한 파장은 워낙 시간이 흐른 문제이고 이 전 부장 본인이 사망해 파장이 크지는 않을 것”이라면서도 “반드시 한번은 짚어야 될 문제”라고 말했다.
강신찬 기자
noni-jjang@hanmail.net
 
이후락, 파란만장 85년 인생
권력자였지만 말년은 ‘불우’


유신시대를 대표하던 권력자였지만, 유신체제 붕괴이후 29년 동안 칩거 생활을 해오던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지난달 31일 오전 11시 45분 파란만장했던 85년 인생을 마감했다.
이 전 부장은 1924년 경남 울산에서 태어나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교했다. 능력을 인정받은 이 전 부장은 육군 정보국 차장 등의 직책을 맡게 된다.
이 전 부장은 1961년 5.16 군사쿠테타가 일어난 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공보실장을 맡으면서 서서히 두각을 드러냈다. 1963년 박정희 의장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임명되며 ‘권력의 화신’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1970년 제 6대 중앙정보부장 맡게 됐으며, 1971년에는 제7대 대통령선거를 총지휘하며 유신권력의 2인자로 확고히 자리 잡게 된다.
1972년 5월 2일에는 3명의 수행원과 판문점을 넘어 3박 4일간 방북하며 김일성 북한주석을 만나 7·4남북 공동성명을 이끌어 냈다.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자살용 청산가리를 품속에 넣어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후 이 전 부장은 1972년 10월 유신체제를 확립하는데 앞장서며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 그러나 1973년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의 ‘박정희 후계자는 이후락’이라는 돌출발언으로 해임되며 권력의 뒤편으로 사라지게 된다.
특히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되고, 제 5공화국이 출범하자 이 전 부장은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비리가 들통 나며 모든 공직을 사퇴해야 했다. 이후 그는 경기도 하남에서 도자기를 구우며 칩거생활에 들어갔다. 자신의 재산을 가지고 자녀들끼리 다툼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이 전 부장은 경희대동서신의학 병원에서 병환을 이기지 못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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