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창원 탈출경로, 이미 알고 있었다"

전과 9범의 범죄자에서 "희망 전도사"로 불리는 인물이 있다. 그 주인공은 새소망선교회(충청북도 청주 소재)의 민학근 목사다. 그는 13살에 집을 나와 절도죄로 소년원에 들어간 것을 시작으로 사형까지 언도 받은 중죄인이었다. 감옥에서만 22년간을 보냈으며 반평생 넘는 세월동안 "전과자"란 꼬리표를 달고 다녔다. 그는 철저히 사회와 단절된 삶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현재는 회개의 삶을 살며 소외 받은 이들에게 "희망전도사"로 불리고 있다. 이번 호에선 민학근 목사의 파란만장했던 교도소 생활에 대해 직접 들어봤다.
 
강화도에서 태어난 민학근 목사는 두 살 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모정을 그리워하며 자랐다. 새어머니를 맞이했지만 그에게 "모정"은 "부재"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새어머니와의 갈등을 겪다 끝내 13살에 나이로 무작정 집을 뛰쳐나왔다. 이후 배고픔을 못 이기고 빵을 훔쳐 먹다 경찰에 잡혀 소년원에 복역하기에 이른다. 이로 인해 그의 인생은 점차 사회와 등을 돌리게 되고 끝없는 범죄의 나락으로 빠져들어 총 22년 동안 철창신세를 지게 됐다.
 
한국판 "프리즌 브레이크"
 
민학근 목사의 방황기는 파란만장했다. 조직폭력, 소매치기, 빈집털이, 골동품 도굴 등이 그가 저지른 죄목이다. 그는 독방생활 11년을 포함 총 22년간을 복역했으며 전과는 9개나 된다. 그가 거쳐 간 교도소는 인천을 시작으로 안양, 원주, 부산, 전주, 청송 등 전국 교도소 16곳에 이른다. 그는 "돈이 되는 일이면 무슨 일이든 하다보니 긴 시간을 철창 안에서 보내게 됐다"고 지난날을 회상했다.
긴 시간만큼이나 민 목사는 교도소 생활에 있어서 수많은 경험을 하게 된다. 그는 그중 제일 기억에 남는 것으로 "탈옥계획"을 손꼽았다. 때는 199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인생의 낙" 조차 없이 교도소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인생의 목표도 없던 시절이라 그는 숨쉬는 것조차 무의미하게 느껴졌다고 전했다. 그는 결국 탈옥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당시 그는 수감 중 옷을 제작하는데 쓰이는 원단 생산 공정 부분에서 일했다. 오랜 수감 생활로 교도관과 친분이 있어 그는 생산된 원단을 출하하는 곳의 감독을 맡게 됐다. 원래 성격이 맡은 일에 대해서는 확실히 해두는 그였기에 교도관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그가 생각해낸 "탈옥 계획"은 원단을 출하하기 위해 온 차량에 몰래 숨어 탈옥하는 것이었다. 출하되는 차량에 원단을 2m이상 높이 싣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 안에 사람이 들어 가리라곤 의심하기 어려웠다.
교도관의 신뢰도 얻었고 같이 일하는 수감자들도 그를 믿었기 때문에 실행에만 옮기면 언제든지 탈출이 가능했다. 그래서 그는 그 해 여름 탈출을 결심했다.
그는 오전업무를 마치고 정오쯤에 수감자 몇 명과 함께 제작이 완료된 원단을 차에 옮겨 싣는 작업을 했다. 원단을 쓰러지지 않도록 쌓아야 하지만 그의 지시 아래 사람이 들어갈 작은 공간을 확보하면서 원단을 옮겨 실었다. 또 파이프관을 외부와 확보된 작은 공간과 연결시켜 공기가 통하게 했다. 그는 이밖에도 미리 탈출을 결심하고 사회에서 입을 옷까지 준비하는 치밀한 준비를 했다. 이제 한 여름의 무더위만 견디면 세상 밖을 나갈 수 있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완벽한 탈출 계획을 짜놓고도 망설이게 됐다. 그의 계획을 막은 것은 그날이 자신을 그동안 정성으로 대해준 전도사와의 면회 약속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지금 그때를 생각해보면 내 자신에게 "왜 안나갔을까?"라고 되묻곤 한다"며 "차에 오르기만 했다면 충분히 나갈 수 있었다. 아마도 지금의 내가 있기 위한 운명과도 같은 순간인 것 같다. 그때 이후로 내 마음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 나갔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 사건 이후 찾아오는 전도사들에게 마음을 열고 그들을 대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신학 공부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고 누군가를 위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작은 희망을 가슴에 품었다.
그는 다른 교도소로 이감 될 때 친분이 있는 교도관에게 모든 사실을 알렸다. 시간이 흘러 그가 목사가 되고 그곳을 수감자가 아닌 "교화봉사자"로 방문했을 때 탈옥을 계획했던 장소에 초소가 세워진 것을 확인했다. 그는 초소를 보면서 당시 찰나의 순간에 옳은 판단을 했음을 확신했다고 전했다.
 
"신창원", "막가파" 만나다
 
민 목사는 총 22년 간 16곳의 교도소에 이감되면서 수많은 수감자와 인연을 맺게 됐다. 그 중에서도 그는 신창원과 막가파와의 만남을 떠올렸다.
민 목사는 1993년 자살실패 후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수없이 많은 교도소로 이감 돼도 신춘자 권사가 자신을 직접 찾아오는 모습에 감동해 마음을 열게 됐다. 그리고 민 목사 자신도 희망이란 것을 가슴에 품게 됐다. 이후 신학공부에 주력하며 주위 수감자들을 교회의 품으로 전도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이때부터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민 목사가 신창원과의 인연을 맺은 것은 신창원이 탈옥하기 1년 전인 1996년이었다. 민 목사가 원주교도소에서 부산교도로 이감되면서 그와 만날 수 있었다. 다만 같은 수감실이 아니라 운동시간 등 여과시간에만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민 목사가 전하는 신창원은 매우 똑똑하고 사람이다. 그러나 마음은 무겁게 닫혀진 사람이라고 전했다. 민 목사는 이런 신창원을 전도하고자 노력했다. 다만 같은 방에 생활하지 못하다보니 시간적 제약이 많았다고 전했다.
민 목사는 당시 상황에 대해 "솔직히 나는 신창원의 탈옥 계획을 눈치 채고 있었다"며 "많은 조언을 했고 다만 스스로 깨닫길 바랬을 뿐이었다. 그러나 신창원과의 만남이 있고 1년 후 그는 탈옥을 감행했다. 그 후 그는 2년 반 동안을 숨어 지내며 "세기의 탈옥범"이 되어 버렸다. 당시에 내가 조금만 더 신경을 썼더라면 상황이 조금은 변하지 않았을까라는 후회가 들기도 한다. 나도 조금만 더 일찍 깨달았으면 더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을 텐데 신앙을 가진지 얼마 되지 않아 내가 부족했다"며 아쉬운 심정을 토로했다.
민 목사는 2000년에 대전교도소에서 "막가파"도 만난 것으로 알려진다. 막가파는 1996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범죄 조직단체였다. 이들을 만나기 전부터 민 목사는 막가파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이들이 씻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지만 그래도 전교를 위해 접근을 시도했다고 밝혔다.
막가파, 이들과의 대화에서의 주요 주제는 "사회에 대한 불신"이었다고 민 목사는 전했다. 민 목사는 이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옛 모습을 투영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자신이 선택한 삶도 아니지만 남과 비교되는 삶이었으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범죄의 소굴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 처절한 현실은 민 목사의 인생이기도 했다.
"막가파" 일당도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던 이들이기에 민 목사는 많은 관심을 가졌다고 전했다. "막가파" 이들은 사형 선고를 받고 수감 중이었지만 민 목사는 이들에게 새로운 삶을 살게 하고자 자신이 알고 있는 전도사들을 동원해 이들의 마음을 열고자 노력했다. 민 목사의 이런 정성이 통했는지 이들 일당 중 한 명을 목회자의 길을 걷도록 인도하기에 이른다.
민 목사는 자신의 삶을 바꾼 후에 많은 재소자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쳤다. 또 이런 노력들로 인해 자신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그동안 유대관계를 맺어오던 전도사들의 도움으로 무기 징역에서 유기징역으로 감형이 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는 주변사람들의 탄원서와 민 목사의 성실한 수감생활로 인해 덤으로 얻게 된 새로운 인생이었다.
 
수감생활 에피소드
 
민 목사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생활을 시작하면서는 아무런 목표가 없었다. 그래서 교도소에서 일어나는 어려운 일들을 모두 겪게 됐다. 수감실에서 서열을 나누는 기 싸움부터 갖가지 고충을 겪었다.
그는 기억에 남는 일화로 술과 담배를 만들었던 일들을 꼽았다. 술과 담배는 수감자들에게 금지 품목이다. 하지만 성인이라면 제일 필요한 품목들이기 때문에 수감자들은 직접 제작해 아쉬움을 달랬다. 특히 담배는 가끔씩 그 안에서 한 갑에 백만원까지 거래가 된 적도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민 목사는 신앙을 접하고 마음이 깊어지면서 바르게살기 위해 이 모든 것과 거리를 뒀다. 오로지 믿음으로만 살기 위해 노력했다.
민 목사는 신앙이 깊어지면서 같이 지내는 교도소 수감자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의 전도 아래 수감자 1,200여명을 세례를 받게 도움을 줬다. 또 그의 설교로 전교자 중 3명이 민 목사와 같이 목회자의 길을 걷게되었다.
민 목사는 "수감 생활에서 만난 수많은 교회의 교인과 목회자들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라며 "그들의 사랑이 수감생활에서의 어려움을 이기게 해준 용기와 믿음을 얻게 해줬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그는 "앞으로 빚진 심정으로 교도소 선교와 이웃돕기에 앞장서겠다"고 계획을 밝혔다.
문수영 기자 trueyoung@y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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