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면제 무전입대’ 허탈감 일파만파

 

대한민국 사회의 골수적인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왔던 ‘병역비리’ 문제가 또 다시 불거졌다. 그동안 병역기피 희망자들은 주로 자신의 몸에 인위적으로 변화를 일으키거나 공갈을 치는 등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을 동원해 가며 면제 판정을 받기 위해 애써왔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어깨탈골’ 병역비리도 비슷한 맥락의 자해 식 수법이다. 특히 같은 시기에 적발된 ‘신종’ 병역비리는 아예 환자를 바꿔치기는 하는 수법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인터넷에서는 군 면제 방법을 알려주는 지경에 이르렀다.

진화는 유기체만 하는 게 아니다. 지난 20년간 군대를 피하고자 하는 이들의 노력과 정성에 힘입어 병역비리 역시 꾸준히 진화해 나갔다. 병역 기피 희망자들이 군 면제를 위해 부단히 애쓰는 모습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인터넷, 병역비리 확산 채널
 
병역비리 진화과정을 지켜보면 시대상에 따른 ‘유행’을 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의료기술이 그다지 발전하지 않았던 70~80년에는 폐결핵, 만성간염, 시력, 정신질환 등 확인 절차가 까다롭거나 진단서를 쉽게 바꿔치기 할 수 있는 수법들이 만연했다. 

90년대에는 이전에 유행했던 병역기피 수단을 이용함과 동시에 ‘민간요법’ 같은 방법도 동원됐다. 주로 자신의 몸을 손상시키는 방법이다. 커피나 간장을 과다섭취한 뒤 항문에 힘을 줘 혈압을 높이거나, 얼음을 깔고 앉아 치질을 걸리게 하는 법,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척추나 무릎 관절을 상하게 하는 방법들이 유행했다.

2000년 초에 들어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사회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던 병역 기피 수단들이 중·하류층에까지 확산되었다는 점이다. 상류층은 장기간 해외 체류나 외국 영주권을 획득 하는 방법을 써왔으며 중·하류층 서민들은 90년대에 유행했던 신체를 훼손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다. 정도는 더욱 심해져 무릎 연골 제거·각막혼탁 수술, MRI 조작 등 최첨단 의료기술을 요구하는 수법으로 병역을 기피해 왔다.

인터넷 보급률이 활발해진 2000년대 중반에는 지난 30년간 쌓아온 병역기피 지식과 사례, 내공이 인터넷을 통해 전파되기 시작됐다 암묵적으로 행해졌던 병역기피 행위는 만천하에 드러났으며, 현역 대상자들 개개인을 병역기피 전문가로 만들어 버렸다.

각종 게시판과 카페 등에는 ‘병역면제를 받기 위한 노하우’와 같은 글들이 버젓이 게시되며 인기를 끌었다. 내용을 살펴보면 ‘은박지를 먹고 X-레이 사진을 찍으면 위장 기관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보인다’, ‘힘을 뺀 채 아령을 들었다 놨다 하면 어깨가 ‘툭’ 하고 빠지지만, 습관성 탈골로 이어질 수 있는 문제가 있다’ 등 검증되지 않은 ‘위험천만한’ 병역면제 수법들이 인터넷 게시판을 타고 번지기도 했다. 실제 이같은 시도가 이뤄지기도 했는데, 신체검사 시 갖가지 비법(?)을 동원해 병역면제를 노린 이들로 인해 병무청은 상당한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병역기피에 대한 인터넷의 역할은 비법을 전수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돈을 벌어볼 심산으로 병역비리 사이트를 만들어 홍보하는 일도 적지 않게 일어났다. 병역비리 사이트가 상당수 등장했고, 전문브로커도 생겨났다. 브로커들은 포털사이트 카페나 미니홈피 등에 접속해 쪽지를 남기는 수법으로 접근했고, 이에 솔깃해진 병역면제 희망자들은 뒷돈을 건네면서까지 병역면제 비법을 전수받았다.

실제 지난 2004년 9월 대한민국을 강타한 프로야구선수들의 병역비리 파문은 전문브로커들의 조직적인 행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사건에 연루된 프로야구선수들은 이들 브로커한테서 받은 알부민 등 약물을 소변에 섞어 신장질환이 있는 것처럼 속여 병역을 면제받았다가 쇠고랑을 찼다. 이들 프로야구선수들은 자신이 소개받은 브로커를 주변 또 다른 지인들에게 다시 소개해주기도 했다. 당시 프로야구 선수 50여명이 병역법 위반 혐의로 수사를 받았고, 30여명이 구속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9월 3째 주, 400명 이상 적발
 
최근 ‘터진’ 두 건의 병역비리 사건은 병역면제 수법이 진화하고 있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특히 지난 9월 중순엔 ‘환자 바꿔치기’라는 신종 병역기피 수단을 이용한 범죄자들이 적발돼 충격을 주고 있다.

사건의 전모는 이렇다. 유흥비가 부족했던 윤모(31)씨는 발작성 심기전증을 앓고 있는 환자이자 도박자금이 부족해 돈을 마련할 길을 모색하고 있던 김모(26)씨에게 접근했다.

김씨의 병이 병역면제사유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윤씨는 자신이 브로커가 돼 군 면제를 희망하는 의뢰자들을 소개시켜 주겠다고 제안했다. 윤씨가 인터넷 카페에 병역비리 사이트를 만들어 의뢰자를 소개시켜주면 김씨는 자신의 건강진단서를 빌려주는 방법으로 환자를 바꿔치기 해 왔던 것이다.

더욱이 윤씨는 인터넷 사이트에 ‘유령학원’을 만들어 113명의 입대연기를 도와주고 7,600만원을 챙기기도 했다. 윤씨와 함께 사이트를 운영하던 또 다른 브로커 차모(28)씨는 한 사람당 40~120만원씩 받고 96명의 병역을 연기시켜 9,300만원의 사례금을 챙겨온 것으로 밝혀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비슷한 시기인 지난 9월 18일 또 하나의 대규모 병역비리 사건이 터졌다. 어깨를 고의로 탈골시키거나 수술해 병역을 기피한 203명이 적발된 것. 사건을 조사 중인 일산경찰서의 한 관계자는 “203명 중 96명을 소환해 61명한테서 병역기피 혐의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어 “최근 5년 동안 어깨탈골과 관련된 수술을 가장 많이 한 병원들을 찾기 시작했다”며 병원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경찰은 사건 발생 일주일 뒤 병무청으로부터 병역비리에 연루된 것으로 보이는 10개 병원과 병역기피 혐의자들의 명단을 모두 넘겨받았다. 이중에는 업체 대표나 대기업 임원의 아들, 4급 공무원, 유명 프로축구, 배구, 농구 선수들이 포함돼 있었다.
경찰은 명단 대상자들에 대한 조사가 끝나면, 의사들을 상대로 병역기피목적을 알고도 수술해줬는지 등을 조사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비난 화살 병무청으로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자 각종 포털사이트의 누리꾼들은 이 충격적 사태에 대해 맹비난을 쏟아 붓고 있다. 주요대상은 병무청에 집중돼 있다. 병원 진단서만 제출하면 면제 판정 받기가 어렵지 않은데다, 특히 병무청이 진료기록부를 조회하지 못해 사후관리가 제대로 안 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현역으로 병장 만기제대를 했다는 한 누리꾼은 “2005년 병무청에서 신체검사를 받을 당시, 환자들이 진단서를 가져왔을 때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대충대충 넘어가는 모습을 본적이 있다”면서 “병무청에서 이렇게 허술하게 행정을 처리하다보니 이번 사건처럼 허위진단서를 제출하고도 병역면제를 받을 수 있지 않았겠는가. 이것은 병무청의 고질적 문제”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네티즌은 “요즘은 돈 없는 사람만 군대간다는 얘기도 있다”면서 “돈 있는 사람들은 갖은 방법 동원해 면제받고, 돈 없는 사람들만 병역의 의무를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으니 ‘유전면제 무전입대’인 셈이다. 악순환처럼 반복되는 병역비리를 뿌리 뽑을 방법은 지원을 받아 군대를 유지하는 모병제 밖에 없지 않을까”라고 꼬집었다.   

한나라당 김영우 의원은 “최근 발생한 병역비리는 병무청의 징병검사체계를 제대로 정비 만해도 막을 수 있는 것이었다”면서 “병무청의 병역처분 기준을 세분화 하는 등 병무청의 징병검사체계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병무청과 국민건강보험공단, 경찰청이 유기적인 업무협조를 통해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비난여론의 화살을 맞고 있는 병무청 측은 상당히 곤혹스런 눈치다. 병무청 측 관계자는 “현재 경찰이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지금은 딱히 의견을 표명할 수 없다”면서 “병역비리는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꾸준히 진화되기 때문에 사전에 방지할 방법이 만만치 않다”고 조심스럽게 말할 뿐이다.

다만 병무청 대변인실의 한 관계자는 “병무청도 이번 사건을 계기로 내부에 병역 기피자들과 관계된 인사들이 있는 조사하고 있는 중”이라며 “신체검사 절차를 더욱 확실히 해 불법 군 면제자들의 사례를 최소화 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에는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모르는 또 다른 ‘신종’ 병역비리를 병무청과 경찰이 어떤 방법으로 막아낼지 귀추가 주목된다.
강신찬기자 noni-jjang@hanmail.net  


군 면제사유 질환 올림픽 
면제 사유 1위 ‘무릎관절 손상·파열’


지난 9월 20일 병무청이 한나라당 김영우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현역면제(5급) 판정에 이용된 질환 중 1위의 영광은 ‘불안정성 대관절’이 차지했다. 건수는 무려 2,753건에 다다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불안정성 대관절’은 무릎관절 등의 인대 손상·파열 질환이다. 수술로 대부분 완치되며 활동에는 특별한 지장이 없다. 댄스그룹 가수나 연예인들이 주로 이 질환으로 병역면제를 받았지만, 수술 후 문제없이 활동하고 있다. 프로축구 선수 이동국 등도 수술 후 완치돼 국가대표로 활동할 정도다. ‘불안정성 대관절’에 따른 병역면제는 2003년에는 7위였다.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면제자를 배출한 ‘경제선 지능 및 정신지체’는 2,744건수로 나타났다. 이밖에 ‘심장질환수술’과 ‘사구체신염’이 각각 2,240, 1,828건수, ‘경련성질환’으로 면제 판정을 받는 사람은 1,633건수로 밝혀졌다.
4급 판정 질환은 4,701건으로 ‘근시·난시·원시 등 굴절 이상’로 인한 면제자가 가장 많았다. 2위는 3,482건으로 ‘신장질환’이 차지했다. 3, 4위를 기록한 ‘척추질환’과 ‘어깨탈구’는 각각 722, 358건수로 신장질환과 비교해 약세를 나타냈다.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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