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차 입’ 법정서도 위력


‘박연차 게이트’ 후폭풍이 심상치 않다.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정관계 로비의혹 수사가 지난 6월 종료됐지만 수사 과정에서 보여줬던 진실게임이 법정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이 사건으로 기소된 21명 중 13명은 이미 1심 판결을 받았거나 결심공판을 마친 상태. 재판부는 기소된 피고인들에게 잇따라 실형을 선고하고 있지만, 피고인들은 이에 불복하고 항소를 준비중이다. 검찰 수사 결과도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피고인들의 진술이 수 차례 번복되는 상황에서 박 전 회장이 후원금을 건넨 여야 현직 의원들의 실명까지 공개되자 난처한 입장에 놓인 것. 실명이 공개된 현직 의원들 중에는 박 전 회장의 진술에도 불구하고 기소되지 않은 몇몇 의원이 포함돼 있어 형평성 논란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일각에선 ‘박연차 리스트’의 범위가 당초 알려진 것보다 확대되는 게 아니냐는 의혹도 나오고 있어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차명으로 후원금 받은 여야 현역 의원 총 11명 공개 파문

피고인 진술 번복되면서 검찰 곤혹, 수사 형평성 논란도

 

박연차 전 회장이 차명으로 후원금을 전달했다는 소문이 나돈 인사들의 이름이 법정에서 처음 공개됐다. 지난달 31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2부 심리로 열린 민주당 서갑원 의원에 대한 공판에서 서 의원 측 변호인이 소문의 주인공인 현직 의원 6명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 바로 한나라당 허태열 최고위원, 안홍준·권경석 의원과 민주당 이강래 원내대표, 김우남·우윤근 의원이다.

박 전 회장은 이날 서 의원측 변호인의 추궁에 허 최고위원에게 후원금을 전달한 사실을 시인했다. 박영석 김해상공회의소 명예회장의 이름으로 2,000만원을 후원한 것. 이어 허 최고위원이 박 전 회장의 최측근으로 불리는 정승영 정산개발 사장을 통해 고맙다는 말을 전달해온 사실도 인정했다.

 


“합법적인 후원금이라 문제없다”

 


그러나 박 전 회장은 안 의원과 권 의원에게 각각 500만원씩 전달한 사실에는 “답변하기 곤란하다”며 회피했고, 이 원내대표와 김 의원, 우 의원에게 각각 1,000만원을 전달한 사실에는 “진술을 거부하겠다”고 입을 닫았다.

박 전 회장의 진술 거부로 소문의 사실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로써 박 전 회장으로부터 차명으로 후원금을 전달받은 것으로 알려진 현역 의원 가운데 일부 인사만 기소된 것만큼은 확실시됐다. 앞서 대검 중앙수사부는 민주당 이광재·서갑원·최철국 의원과 한나라당 박진·김정권 의원 등 5명을 기소했다.

이는 정 사장이 박 의원의 공판에서 “운동화 지급자 명단을 작성한 뒤 모두 10여명의 정치인에게 총 1억8,000여 만원의 정치자금을 줬다. 여야 의원이 반반 정도 분포하고 있다”고 진술한 것과 일치하고 있다.

더욱이 정 사장은 당시 “검찰이 기소하지 않은 정치인이 있는 것으로 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박 전 회장의 진술이 나름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 셈.

하지만 검찰은 금품을 받고도 처벌하지 않은 정치인이나 검사가 더 있다는 증언이 계속되는 데 대해 대가성이 입증되지 않았다는 설명을 되풀이하고 있다. 검찰은 이날 박 전 회장의 증언에 대해서도 “차명으로 돈을 보냈기 때문에 차명 후원금이 박 전 회장의 돈이란 사실을 몰랐던 의원은 기소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검찰의 이 같은 해명에도 불구하고 수사의 형평성 논란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박 전 회장이 허 최고위원으로부터 감사의 표시를 전해 들었다고 증언했기 때문이다. 물론 허 최고위원은 박 전 회장의 증언 내용에 대해 결백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

그는 “당시 그 후원금을 낸 사람 이름을 실명으로 알았을 뿐 박 전 회장이 차명으로 숨어있었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면서 “정 사장은 얼굴도 이름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결국 ‘박연차 리스트’에 연루된 피고인들의 공판이 횟수를 거듭할수록 박 전 회장과의 진실공방 양상이 더욱 짙어지고 있는 형국이다.

허 최고위원을 비롯해 ‘박연차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게 된 다수의 현역 의원들은 “합법적인 후원금만 받았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박 의원 측은 “그동안 후원금을 보낸 사람의 신원을 확인해봤지만 이 가운데 박 전 회장이 자신의 이름으로 보낸 것은 전혀 없다”고 해명했고, 서 의원 역시 “태광실업 임원이 2006년 500만원, 휴켐스 직원 2명이 지난해 500만원씩 합법적으로 후원해 영수증 처리해 준 것 외에는 없다”고 설명했다. 우 의원과 김 의원도 “합법적으로 받은 후원금 외에는 어떤 것도 받은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여전히 일각에선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당사자들의 해명이 어떠하든 박 전 회장이 박 명예회장을 비롯해 정 사장, 정 사장의 동생 정모씨 등 자신의 측근들을 통해 후원금을 제공한 정황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박 전 회장이 또 다른 주변 인물들을 통해 또 다른 정치인에게 후원금을 전달했을 가능성도 완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이에 따라 ‘박연차 리스트’의 범위가 당초 알려진 것보다 확대될 것으로 예측하는 시각이 많다.

 


천신일, 박연차 조기 석방 약속?

 


여기에 소문으로만 떠돌던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과 한상률 전 국세청장의 구명 로비도 점차 윤곽을 잡아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지난달 26일 천 회장 공판에 증인으로 나온 태광실업 전무 최모씨의 증언이 결정타로 작용됐다.

최씨는 이날 공판에서 “지난해 8월 태광실업 세무조사 당시 천 회장이 ‘걱정하지 말고 충실하게 세무조사를 받아라. 한 청장을 잘 알고 있어 여러 번 잘 봐달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박 전 회장이 풀려나지 않자 지난 2월 “자신이 힘이 없다며 미안하다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천 회장의 변호인은 “같이 노력해 보자는 취지에서 말한 것이었을 것”이라고 반박했지만 파문은 쉽게 가라않지 않고 있다.

반면 기소된 이 의원은 판세를 뒤집고 있다. 첫 공판이 있던 지난 6월11일 박 전 회장이 “고개 숙여 사과한다”고 사죄까지 할 정도. ‘박연차 게이트’에 연루된 인사 20여명에 대한 재판부의 선고가 속속히 이뤄지면서 세간의 이목이 다시 한번 쏠리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박 전 회장의 1심 선고는 오는 16일로 예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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