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신문=홍의석 기자] 서울 용산구는 강남과 강북을 잇는 사통팔달 교통 요충지다. 

서울의 심장으로 불리는 용산은 1980년대부터 국내 대표 기업들이 초고층 사옥을 짓고 랜드마크 경쟁을 벌이며 속속 자리를 잡았다.

넥타이부대가 몰리자 미군이 주둔한 기피 지역에서 돈과 사람이 몰리는 요지가 됐다. 

용산의 황금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사태가 터지면서 용산에 터를 잡았던 국내 유수기업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이후 ‘용산의 저주’, ‘서울역 괴담’ 등 흉흉한 말들이 세간의 입에 오르내렸다.

더욱이 잇따른 기업 도산으로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지역 상권은 풍비박산이 났다. 이후 용산은 남영동 미군 부대 뒷길 스테이크 골목만이 추억 속 상징이 될 만큼 뜨거운 심장에서 차가운 변방으로 변하고 말았다.

국제그룹, 용산 잔혹사의 시작

80년대 초반 서울 여의도 63빌딩과 함께 한국의 대표 랜드마크로 불렸던 LS용산타워(옛 국제빌딩).용산과 남산 자락 서울역 인근에 자리 잡은 기업들의 잔혹사는 30년 전부터 시작됐다.

서울 용산 한강로2가에 자리 잡은 이 빌딩의 주인은 프로스펙스로 유명했던 국제그룹(회장 양정모)이다. 국제그룹은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21개 계열사를 거느렸다.

당시 재계 6위 굴지의 기업이었던 국제그룹은 국제빌딩 입주 2년 만인 1985년 공중 분해됐다.

재계는 국제그룹 해체와 관련, 1980년대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 ‘재벌 길들이기’의 일환이라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부산기업인 국제그룹이 정권에 고분고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전격적으로 해체됐다는 것.

재계에서는 당시 국제그룹이 재계 6위임에도 불구하고 군사정권의 정치자금 요구에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고, 3개월짜리 어음으로 10억원만 상납하는 등 정권에 불성실한 태도를 보인데다, 양 회장이 전두환 대통령 주최 만찬에 폭설로 늦는 등의 모습을 보이자 ‘손봐주기’ 목적으로 그룹을 해체했다는 얘기가 회자됐다.

양 회장은 5공화국이 끝난 후 국제그룹 해체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헌법소원을 제기했고, 1993년 7월 헌법재판소는 “전두환 정부가 국제그룹 해체를 지시한 것은 기업 활동의 자유와 평등권을 침해했다”며 재판관 8인의 다수의견으로 위헌이라고 판결했으나 그룹을 되찾지는 못했다.

국제그룹 공중분해이후 한동안 잠잠했던 괴담은 1997년 다시 시작됐다. 용산 남영동에 자리 잡은 해태제과는 모기업인 해태그룹 부도와 함께, 경영권이 크라운제과로 넘어갔다.

갈월동 갑을빌딩을 사옥으로 사용했던 갑을방직 역시 IMF 사태 후 경영이 난관에 봉착하며 1990년대 말 문을 닫았다.

대우그룹, 남산 자락서 낙마

서울 용산에서 시작된 괴담은 이후 서울 중구 서울역 인근으로 옮겨 붙었다. 서울역 인근은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회장은 사옥 건립을 앞두고 “서울역 맞은편은 터의 기운이 좋지 않다”는 풍수가들의 조언에 따라 사옥 후보지에서 제외시켰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당시 서울역 주변은 서쪽을 바라보는 빌딩을 보유한 기업이 어려워진다고 확인되지 않은 말들이 횡횡했다. 이는 건물을 지을 때 서향이나 북향은 일조가 좋지 않아 동남 혹은 남향을 하고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풍수지리학적 의견이 반영돼 나온 부풀려진 이야기다.

속설의 가장 잘 알려진 예가 서울역 건너편 서쪽을 바라보며 자리 잡은 서울스퀘어(옛 대우빌딩)의 주인 대우그룹의 몰락이다.

대우그룹은 1980년대부터 1990년대 말까지 제계서열 2위를 지켜왔지만, 1997년부터 시작된 경제 위기로 입지가 흔들리면서 1999년 10월 워크아웃(기업 재무구조 개선작업)에 돌입한 후 해체됐다.

대우그룹 해체 후 옛 대우빌딩의 2대 주인이 됐던 금호그룹 역시 2009년 말 워크아웃에 들어가면서 방을 내놨다.

바로 옆 둥지를 틀었던 STX그룹도 초고속 성장을 거듭하다 실적 악화와 자금난을 견디지 못하고 2013년 그룹이 해체됐다. STX 사옥도 서울스퀘어와 함께 서울역 인근에 위치한 대표적인 서향 건물이다.

이밖에 서울역 맞은편에 게이트웨이타워(옛 벽산125)를 지은 벽산건설 역시 1998년 재무위기를 맞으며 워크아웃에 돌입했고, 2014년 법원으로부터 파산 선고를 받았다. 게이트웨이타워는 현재 동부화재로 주인이 바뀌었다.

GS 등 잇딴 위기…괴담, 정설로

그룹 해체는 아니지만 서울역 인근에 위치한 재벌기업들이 위기를 겪으면서 괴담은 마치 사실처럼 굳어졌다.

지에스(GS) 역전타워에 있던 지에스건설 역시 실적 악화로 몸살을 앓다 2013년 종로구 청진동 그랑서울로 본사를 이전했다.

용산과 서울역을 둘러싼 괴담은 경제 불황과 위기관리 실패로 기업들의 위기와 불운이 겹치면서 나온 과장된 이야기라는 것이 중론이다. 

그러나 재계 총수들 사이에서 사옥 이전이나 건립 시 풍수지리에 대한 자문을 구하는 풍조는 여전히 존재한다. 이는 미신이라고 치부하기엔 그 영향이 꽤 크다는 것을 시사한다.

떠도는 속설과 상관없이 서울역이나 용산 인근으로 사옥을 이전 했거나 이전을 준비하고 있는 기업들도 있다.

KDB생명은 2013년 말 서울역 인근에 사옥을 이전했다. LG유플러스는 지난해 4월 용산 한강로 본사 이전을 완료했다.

아모레퍼시픽은 용산 한강로 통합 신사옥 공사가 한창이다. 괴담을 비웃 듯 매년 고속성장세를 구가하며 사세를 확장하고 있다. 신사옥 입주는 2017년 예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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