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서 눈물 흘리며 유랑생활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이 행방불명이다. 지난 1991년 ‘수서특혜비리 사건’과 1997년 ‘한보비자금 사건’ 이후 ‘강릉 영동대학 교비 횡령’으로 세 번째 법정구속을 앞두고 있지만 정 전 회장의 동선이 뚜렷하지 않다. 지병 치료차 2007년 5월 일본으로 출국한 뒤 지금까지 종적을 감춘 채 입국을 미루고 있는 것. 정 전 회장이 지난해 3월 범죄인 인도 협정을 맺지 않은 카자흐스탄 인근의 키르키스스탄의 비쉬켁으로 거처를 옮겼다는 게 현재 검찰 조사에서 밝혀진 사실의 전부다. 이에 따라 검찰은 지난 5월14일 대법원에서 징역 3년 6개월의 확정판결을 받은 정 전 회장을 3개월이 지나도록 구속시키지 못하고 있다. <민주신문>이 정 전 회장의 행적을 추적했다.

 

월세 밀리자 ‘왕회장’ 자택에서 한남동으로 이사한 뒤 ‘또’ 이사

검찰 조사로 강릉 영동대 도피자금줄 ‘뚝‘ 현지인 도움으로 은신

 


서울 강남구 대치동 316번지 은마아파트 종합상가. 바로 이곳 3층이 한보그룹 본사 사무실이 있던 자리다. 평소 역학에 관심이 많던 정태수 전 회장은 은마상가의 허름한 사무실이 “재물운을 갖다 주는 곳”으로 믿었던 탓에 애착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정 전 회장은 강남 개발붐으로 은마아파트가 히트를 치며 사업이 번창될 1980년~1990년대에도 사무실 이전을 고려하지 않았고, 1997년 부도를 맞은 뒤 2006년 2월 월드와이드컨설팅이 새 주인으로 나설 때까지도 사무실에 꾸준히 출근하는 열의를 보였다.

 


임대료 없어 쫓겨난 후계자

 


대장암 판정으로 2002년 특별사면을 받고 출소한 정 전 회장이 2년여의 침묵을 깨고 재기를 알렸던 것도 바로 은마상가의 사무실에서였다. ‘한보철강 정상화방안 발표’ 기자회견을 열고, 자신에게도 입찰 참여 기회를 줄 것을 호소했던 것. 정 전 회장은 “한보철강을 돌려주면 6조1,000억원의 부채를 모두 갚고 당진제철소를 완공해 2007년에는 정상 가동하겠다”며 큰소리쳤지만, 입찰 참여 요구는 거부됐고 결국 한보철강은 현대차 계열인 INI스틸-현대하이스코 컨소시엄이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최종 선정되면서 정 전 회장은 재기의 기회를 잃었다. 이후 은마상가도 월드와이드컨설팅에 넘겨줘야 했다.

현재 은마상가는 한보그룹의 전신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정 전 회장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정 전 회장이 사무실로 사용했던 3층은 대학입시 학원으로 탈바꿈된 상태. 은마상가 내에서 전 한보그룹 직원이 운영해오던 (주)보광특수산업, 보화기업(주), (주)상아여행, 영월랜드(주) 등도 모두 철수됐다.

은마상가에서 27년 간 근무하면서 한보그룹을 가까이서 지켜봤다는 한 관계자에 따르면 월드와이드컨설팅이 경매에서 은마상가를 낙찰 받은 이후 정 전 회장의 후계자로 지목됐던 3남 보근씨가 “이주비를 주지 않으면 못나간다”고 고집을 피우자 월드와이드컨설팅 측에서 사람을 불러 강제로 쫓아냈다. 따라서 월드와이드컨설팅이 낙찰 받을 당시 항간에 떠돌았던 월드와이드컨설팅 실소유주가 정 전 회장이라는 소문은 사실무근이라는 게 관계자의 설명이다.

그는 “전기도 끊기고 아무도 없는 빈사무실에 보근씨가 매일같이 출근하다 도망가다시피 내쫓겨졌는데, 정 전 회장과 월드와이드컨설팅이 무슨 관계가 있다면 그렇게까지 했겠나. ‘쇼’라고 하기엔 그런 난리가 없었다”면서 “정 전 회장이 보근씨를 많이 아꼈다. 장남은 착했지만 별 볼 일 없었고, 둘째는 카지노에 빠져서 재산을 탕진했는데 만약 세간의 의혹대로 정 전 회장이 숨겨놓은 돈이 많이 있다면 보근씨를 저대로 가만 놔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여 말했다.

보근씨는 사무실 하나 얻을 임대료조차 없어서 은마상가 근처를 전전하다 내쫓긴 이후에는 발길을 뚝 끊었다.

물론 은마상가 상인들도 정 전 회장의 ‘숨겨진 돈’에 확신을 가진 때도 있었다. 정 전 회장이 현대그룹 계동 사옥 뒤편에 자리한 가회동 177-1번지 자택에 월세로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부터 상가 주민들이 의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것. 매달 2,000만원을 월세로 지급하기엔 당시 정 전 회장의 형편이 어려웠을 때라 쉽게 납득이 안 간다는 얘기다.

 


며느리와 학교법인 맞고소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정 전 회장은 가회동 자택을 고집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화신백화점 창업주이자 재계의 거물이었던 박흥식씨에 이어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살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 만큼 ‘좋은 집터’로 명성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현재는 부동산업을 하는 정모씨의 소유로 넘어갔다. 462평의 터에 연건평 150평에 이르는 2층 고급 양옥인 이 자택은 시가 50억원이 넘어 이 자택의 구입이 쉽지 않자 정 전 회장은 2003년 10월부터 보근씨 내외와 함께 월세로 살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졌다.

집주인인 정씨는 당초 월세를 준 입주인이 정 전 회장인 줄 몰랐다. 입주 후 국세청 등으로부터 정 전 회장과의 관계를 묻는 전화를 많이 받은 다음에서야 정 전 회장이 대리인을 내세워 계약한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지금은 가회동 자택에서도 정 전 회장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정 전 회장은 월세 계약이 끝나기도 전에 1심 선고공판 직후 지병 치료를 이유로 일본으로 출국했다. 남겨진 가족들은 월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한남동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그러나 곧 더 싼값의 아파트로 다시 한 번 이사를 간 것으로 전해졌다.

한보그룹 일가 내부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그동안은 정 전 회장의 며느리가 학교 이사장, 학장으로 있으면서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지만 학교에서 쫓겨난 후로는 수입이 끊겨 더욱 어려운 생활을 했던 것으로 전해 들었다”면서 “재벌이 망하면 3년은 간다는데, 정 전 회장은 알거지가 되고도 막대한 세금 체납에다 월세마저 밀리면서 이사로 집을 전전하는 신세로 전락했다”고 혀를 찼다. 이어 “사실 학교에서 빼돌린 돈의 상당수가 정 전 회장의 변호사 비용으로 다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다. 결국 변호사만 살찌우고 정작 본인은 빈털터리가 됐다”고 덧붙여 말했다.

정 전 회장의 며느리가 있었다는 강릉 영동대학교는 1983년 9월 정 전 회장이 학교법인 한보학원 설립과 동시에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한 뒤 그의 일가족이 최근까지 이사장과 학장을 역임해왔다. 차남 보근씨의 부인 김정윤씨가 2007년 10월 9대 학장으로 취임했지만 지난 2월 직위해제 됐고, 6월부터는 이사회로부터 해임을 통보 받았다.

이사회는 “학교법인의 기본자산인 무기명 양도성 예금증서를 담보로 불법 대출을 받고 법인카드를 개인용도로 사용했으며 용역 계약을 불법으로 하는 등 학교 경영에 상대한 피해를 주었다. 감사에서도 학장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으로 직위를 남용한 것이 드러나는 등 더 이상 학교 학장으로서 직무를 수행하기 힘들다는 판단에 따라 중징계 해임을 의결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김 전 학장은 학교측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상태다. 해임 취소 소송도 제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얼마큼 승산이 있을지는 미지수다. 검찰 조사 결과 정 전 회장은 도피 중에서도 김 전 학장을 통해 영동대 출신 간호사 4명을 카자흐스탄으로 불러 간병을 받았다. 더욱이 이들을 학교 교직원인 것처럼 꾸며 임금 4,200만원을 교비로 지급토록 했다. 뿐만 아니다. 카자흐스탄에 해외유학생 유치를 위한 지사를 설립하게 한 후 운영비 명목으로 1억3,500만원의 교비를 횡령해 생활비로 쓴 사실이 추가적으로 밝혀졌다.

결과적으로 이사회측의 주장처럼 김 전 학장의 직위 남용으로 영동대는 때아닌 재정난을 겪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사태를 겪으면서 현재 영동대에는 정 전 회장과 관련된 인맥은 남아있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 전 회장의 도피 자금줄이 끊긴 셈. 하지만 정 전 회장의 소환 전망은 밝지 않다.

한나라당 최고위원을 지낸 이강두 전 의원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카자흐스탄 한인 동포들과 현지의 우리 기업인에게서 ‘정씨를 좀 도와줄 수 없느냐’는 부탁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카자흐스탄에 상당한 정·재계 인맥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정 전 회장이 “한국의 자원외교를 위해 여생을 바치고 싶어한다”면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법적인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찾아봐 달라는 것. 도피자금줄은 끊겼지만 정 전 회장이 현지인의 도움을 받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복역 중 세상 뜰까 두려워”

 


일각에서도 정 전 회장의 입국은 “없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이미 대법원에서 징역형으로 확정판결을 받은 만큼 입국 즉시 교도소행이 불 보듯 뻔한 상황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리가 만무하다는 것. 이는 지난해 10월 서울고검 형사3부 심리로 열린 공판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이날 변호인 측은 “85세의 피고인이 이미 다른 사건으로 오랫동안 수감생활을 했고, 이 사건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상태에서 항소심에도 실형을 받아 복역하게 되면 복역 중 세상을 뜰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입국을 미루고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검찰은 정 전 회장에 대해 발부했던 구속영장이 지난해 12월17일로 만료됨에 따라 앞으로 1년 간 유효한 구속영장을 다시 발부하고, 정 전 회장의 소환을 위해 방안을 고심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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