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람쥐’처럼 빠져가다 덜미


 

▲ 천씨의 신출귀몰함에 이태원 일각에선 "밤 10시 넘어 배꼽티를 입고 다니면 100% 다람쥐한테 걸린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사진은 이태원 골목을 거닐고 있는 20대 여성.(사진은 본기사와 무관함)

이태원동·청파동 일대서 13차례 연쇄 성폭행
천씨 “얼마 뒤부턴 사람도 죽일 작정” 폭로

숙명여대 학생을 공포에 떨게 한 ‘이태원 다람쥐’가 잡힌 것은 지난 9월 4일. 이날 새벽 4시께 주머니 사정이 안 좋던 천씨는 이태원 주택가를 지나가던 중 ‘직업 본능’이 발동했다. 이른 시간으로 모두들 깊은 잠에 빠져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천씨는 한 지하 주택을 털기로 결심한 것.

그러나 당시 이 집엔 집주인 A씨가 잠에서 깨어 있었다. 집 안에 침입한 천씨는 금품을 훔치기 위해 여기저기 뒤지기 시작했다. 그때 잠에서 깬 집주인 A씨는 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거실로 나왔다. 집주인과 마주친 천씨는 황급히 집밖으로 도망쳤지만 집주인의 신고로 출동한 관할 지구대 경찰들에게 10여분만에 붙잡히고 말았다.

동종전과만도 ‘수두룩’

천씨는 당시 지구대 경찰에게 “주위를 걷고 있는데 ‘도둑이야’라는 말을 듣고 도와주러 들어갔었다”며 태연히 말했다. 하지만 관할 지구대 측은 집주인 A씨의 진술을 확인하고 즉각 용산경찰서에 신병을 인계했다.

용산경찰서 강력 2팀 관계자는 “천씨를 잡기 위해 전담반까지 설치하는 등 수개월에 걸쳐 수사해 왔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붙잡힐 줄 몰랐다”며 “이태원 다람쥐와 인상착의가 비슷한 점에 주목해 그간 모아둔 자료를 보여주며 천씨를 추궁하자 성폭행과 강도 혐의를 자백했다”고 말했다.

용산경찰서는 올해 초부터 이태원동·청파동 일대에 혼자 사는 20대 여성을 상대로 성폭행 사건이 비일비재하자 전담반까지 편성해 수 차례 수사에 나섰지만 그 때마다 천씨는 전담반을 따돌리고 요리조리 교묘하게 수사망을 빠져나갔다. 이에 전담 경찰들은 ‘다람쥐처럼 잘도 빠져나간다’는 의미로 천씨에게 ‘이태원 다람쥐’라는 별명을 붙여 탐문 수사를 벌여왔던 것. 천씨의 신출귀몰함에 이태원 일각에선 ‘밤 10시 넘어 배꼽티를 입고 다니면 100% 다람쥐한테 걸린다’는 소문이 떠돌았을 정도다.

하지만 경찰은 이미 천씨의 ‘얍삽’한 범행에 대한 몇 가지 단서를 확보한 상태였다. 피해 여성에게 정액을 채취한 경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유전자 감식을 의뢰해 DNA가 일치하다는 결과를 얻었다. 또 경찰은 범인이 성폭행시 피해자의 머리에 이불을 뒤집어 씌워 자신의 얼굴을 못 보게 하는 등 범행수법이 유사한 점을 발견해 ‘동일범에 의한 연쇄 성폭행사건’에 무게를 두고 수사를 벌였던 것.

또한 경찰은 이태원동과 청파동 일대에서만 범행이 이루어진다는 점으로 보아 범인은 이 지역에 상당한 지리감이 있는 사람이며, 특히 범인이 증거를 남기지 않고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아 강간이나 절도 전과가 있는 자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수사망을 좁혀가고 있었다.

절도미수로 지구대에서 인계된 천씨는 모든 점에서 미뤄 경찰이 그려놓은 용의자와 딱 들어맞았다. 검거 당시 천씨는 성폭행과 강도 혐의를 강력히 부인함에 따라 경찰은 일단 천시를 주거침입 및 절도미수 혐의로 구속영장을 발부 받아 신병을 확보했다.

“이렇게 살 바엔…”

경찰에 따르면 천씨는 이미 동종전과로 12년 간 복역한 경력이 있는 상습범이다. 경찰 관계자는 수감생활 이후에도 또 연쇄 성폭행을 감행한 천씨에 대해 “보통 10년 이상 수감생활을 한 전과자들의 경우 이미 범죄에 대해 중독이 된 상태”라며 “천씨의 경우도 이와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관계자는 또 “천씨가 경찰조사 중에 ‘얼마 뒤부턴 사람도 죽일 작정이었는데 이렇게 붙잡혀 천만다행’이라며 오히려 ‘지금 붙잡힌 게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하는 등 삶을 포기한 사람 같았다”고 전했다.

경찰에 따르면 천씨는 이태원동과 청파동에 위치한 하숙집이나 원룸촌을 돌며 밤늦게 귀가하는 젊은 여성의 뒤를 밟아 혼자 사는 것을 확인한 뒤 다음날 집을 다시 찾아가는 수법으로 범행을 저질렀다. 젊은 여성들의 경우 성폭행시 수치심에 신고를 못할 것이라고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천씨는 주로 유동인구가 적은 새벽에 하숙집과 원룸의 방범창을 뜯고 들어갔다.

경찰 관계자는 “이태원동과 청파동 일대엔 유독 숙대생들이 자취를 많이 하고 있었다”며 “젊은 여성을 대상으로 범행을 저질러온 천씨에게 방범이 허술한 하숙집에 혼자 살고 있는 숙대생들이 범행 대상에 적격이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경찰 관계자는 “천씨는 전과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이 운영하던 만화방 건물주로부터 계약해지를 당했다”며 “최근엔 동일사유로 부인에게 이혼까지 당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천씨는 ‘어차피 이렇게 살 바엔’이란 심정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며 “수북히 쌓인 전과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기엔 우리 사회가 너무 각박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유전자를 감정결과 사건현장에서 확보한 DNA와 천씨의 DNA가 일치했다”며 “범행 일체를 자백한 천씨는 범행 당시 마음에 드는 여성의 집엔 두세 차례 들어가 잇따라 성폭행하기도 했다”고 잔혹한 천씨의 범행 행각에 대해 혀를 내둘렀다.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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