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이름으로…’ 재기 몸부림


 

▲ 빈소에 모인 홍일, 홍업, 홍걸씨는 슬픔을 달래며 DJ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사진은 차남 홍업과 막내 홍걸씨.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자식 사랑은 남달랐다. 험난한 정치역경을 거쳤던 만큼 평생 자식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렸던 것으로 전해졌다. DJ는 사형수 시절 아들들에게 보낸 옥중서신에서 “아버지의 납치사건과 연금생활과 감옥. 이런 일들이 사춘기의 너희들에게 준 충격이 얼마나 컸을까 생각할 때 아버지는 언제나 본의 아니게 못할 일을 한 것 같은 죄책감을 느껴왔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DJ는 표현에 약했다. 미안한 마음을 늘 가슴속에 품어둘 뿐이었다. 때문에 세 아들이 비리에 연루된 일명 ‘홍삼게이트’가 터졌을 땐 DJ의 낙심이 매우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희호 여사가 아들 얘기를 꺼내는 것조차 질색할 정도였다. 아들 내외와 무언의 화해를 하고 왕래를 재개한 것도 불과 몇 해 전부터다. DJ의 서거 후 아들들은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DJ 마지막 길 함께 한 삼형제, 회한으로 연일 침통한 모습
홍일 투병 전력ㆍ홍업 정치 재기 모색ㆍ홍걸 다시 중국행


장남 홍일씨는 DJ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파킨슨병 진단을 받은 이후 한동안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나지 않았던 만큼 정가는 물론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반응은 충격적이었다. 좋았던 체격은 온데 간데 없고 수척해진 모습으로 휠체어를 타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의사소통도 불가능했다. 투병 중인만큼 최근까지 침대에 누워서 생활하다 DJ의 입원으로 병원에 세 차례 다녀간 것으로 알려졌다. DJ의 임종도 불편한 몸을 휠체어에 기댄 채 겨우 지킬 수 있었다. 당시 홍일씨는 일시적으로 언어장애를 극복하고 기적적으로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최 비서관에 따르면 홍일씨는 이희호 여사가 임종 20여분 전 “하나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저희에게 보내주세요”라고 기도를 드리는 도중 힘겹게 입을 떼 한 음절씩 “아, 버, 지”라고 불렀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사력을 다해 부른 것이었다.
18일 조문 당시에도 홍일씨의 모습은 빈소를 찾은 지인들에게 안타까움을 샀다. 헌화를 하기 위해 불편한 몸을 휠체어에서 일으키려 애쓰던 홍일씨의 모습에 눈시울이 붉어졌던 것. 의료진이 모두 말렸지만, 홍일씨는 20일 입관식 후 DJ의 운구행렬을 따라 여의도 국회까지 함께 동행하며 아버지의 마지막 길까지 ‘상주’의 자리를 지켰다. 아버지에 대한 사무침이었다.
홍일씨는 16대~17대 민주당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나 2003년 나라종금 로비사건으로 검찰의 조사를 받았다. 결국 1억5,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2006년 9월 집행유예 3년의 형이 확정돼 의원직을 잃은 뒤 DJ와 잠시 소원하게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 DJ 만큼이나 홍일씨의 삶도 파란만장했다. DJ가 박정희 전 대통령에 맞서 대통령후보로 나섰던 1971년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고초를 겪었고,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됐다. 당시 홍일씨가 고문을 받는 과정에서 허리와 척추를 심하게 다친 것으로 전해졌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파킨스병 발병 역시 당시의 고문후유증으로 보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여사의 자서전에 따르면 홍일씨는 DJ의 혐의를 허위 자백하지 않기 위해 고문을 받다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다. 이로 인해 DJ는 홍일씨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가져왔다고 한다.
차남 홍업씨는 임종 순간 DJ에게 용서를 구했다고 전해졌다. 당시 병실에 함께 자리를 지켰던 장석일 성애병원 원장은 “가족들과 측근들이 돌아가며 한 마디씩 한 후 임종이 임박해졌을 때 홍업씨가 ‘아버지, 죄송합니다’라고 참회하며 울먹였다”고 말했다. 이어 “남은 가족을 잘 챙길 테니 걱정마시라”며 DJ를 안심시켰다.
홍업씨는 DJ 정부 말기 기업체 이권청탁 명목으로 25억원, 정치자금 명목으로 22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돼 DJ에게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물론 이전까지 홍업씨는 DJ에게 든든한 지원자였다. 홍일씨와 함께 정치권에 몸담으며 DJ의 대통령 당선을 도왔던 것. DJ 망명 시절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설립했고, 광고회사 ‘밝은 세상’을 운영하며 1997년 대선에서 선거홍보 책임을 맡았다.

오점 씻기 위한 재기

이후 2007년 재보선으로 무안ㆍ신안 국회의원이 됐으나 이듬해 18대 총선에서 민주당 공천을 받지 못하고 무소속으로 출마, 고배를 마셨다. 현재는 가끔 지역구에 방문하면서 정치적 재기를 모색 중에 있다는 전언이다.
반면 홍걸씨는 두 형들과 달리 정치와 거리를 뒀다. 고등학생 때인 1980년 DJ의 사형선고를 지켜보며 크게 상심했던 탓이다. 하지만 홍걸씨도 2002년 최규선 게이트에 연루돼 DJ 재임 시 구속되는 불효를 저질렀다.
이후 홍걸씨는 중국에 머물며 DJ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모색 하던 중 아버지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지난 9일 급히 귀국해 DJ의 임종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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