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지’였지만 권력 앞에선 ‘라이벌’

DJ와 YS는 1963년 제6대 국회에서 의원으로 만났다. 이후 DJ와 YS는 야권에서 승승장구를 거듭하는 동시에 고비 때마다 격돌했다. 민주화 투쟁을 위해 서로 협조하고 신뢰했으나 1987년 13대 대선을 앞두고 후보 단일화 실패한 후 서로 등을 돌렸다.

집권 민정당 노태우 후보를 상대로 DJ와 YS 모두 독자 출마했으나 참패했고, 이로 인해 정권 교체를 열망했던 국민들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했다. 이 과정에서 YS가 노태우, 김종필과 함께 3당 합당을 통해 민자당을 만들면서 DJ와 여야로 갈렸다. DJ는 이후 1992년 대선에서 YS와 맞섰으나 무릎을 꿇고 정계를 은퇴했다.

두 사람의 악연은 DJ가 대선 4수 끝에 1997년 15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끝나는 듯 했다. 그러나 1998년 DJ정권이 들어선 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원인 규명을 위한 청문회를 통해 YS의 경제 실정이 낱낱이 드러나면서 또 한번 갈등을 빚었다. 특히 아들 문제로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YS의 집권시절 검찰은 DJ의 비자금 의혹에 대해 수사유보를 결정하면서 DJ가 대선에서 승리하는데 길을 터 줬으나 DJ는 반대 여론에 고민을 거듭하다 뒤늦게 현철씨를 사면했다. 때문에 YS는 크게 분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남북관계를 놓고 YS는 보수, DJ는 진보의 목소리를 대표하면서 대립각을 세웠다.


결국 DJ와 YS의 해묵은 감정은 DJ가 죽음을 앞둔 지난 10일, YS가 병원을 찾으면서 50년 만에 해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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