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끝 오기정치'의 진수...여권 "우리도 지친다"


 

▲ 노무현 대통령의 연정 발언으로 인한 최근의 정국 혼란 상황이 지난해 탄핵정국 때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취임 첫 해 대뜸 “대통령 못해먹겠다”며 국민을 놀라게 했던 노무현 대통령이 결국 대통령직을 포기할 뜻을 내비쳤다.

정치권은 또 한번 발칵 뒤집혔다. 29%짜리 대통령 운운하며 권력을 통째로 내놓겠다는 대통령의 발언에 여권 인사들조차 민망해하고 있다.

노 대통령 주변의 몇몇 사람들을 제외한 국민 대부분이 어이 없어하는 분위기다. 나라 전체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줘가면서까지 ‘대연정’에 목을 매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비난이 거세다.

야권은 한결같이 노 대통령의 ‘25일’ 발언을 맹비난 했다. 하지만 이후로는 전에도 그랬듯이 무시하고 있다. 오히려 열린우리당 내 불만이 갈수록 증폭될 조짐이다.

"벼랑끝 오기 정치"의 진수를 보여준 데 대해 ‘우리도 솔직히 지친다’는 표정이 여권에서 역력하게 드러나고 있다. 무슨 속내로 대연정을 이토록 고집하는지 말들이 많다.

하지만 노 대통령 역시 정치인들의 존재론적 속성인 ‘정권 쟁취 및 유지’를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중이라는 결론으로 귀착된다. 선거에서의 승리를 준비하기 위한 ‘노무현식 포석’이란 분석이다.

2004년 2월 24일 노 대통령의 취임1주년을 기념한 방송기자클럽 초청토론회가 열리고 있었다.

TV를 통해 노 대통령의 ‘말’을 듣고 있던 한나라당 의원들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홍사덕 원내총무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저런 소리 들으면서 가만히 있을 순 없다”면서 “아예 대놓고 선거법을 위반하고 있는데, 정말 탄핵이라도 해야 되겠다”고 흥분했다.

당시 노 대통령은 토론회에서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에 압도적인 지지를 기대한다”면서 선거법에 위반이 될만한 발언을 했다. 야권은 심하게 반발했다. 직접적인 선거개입에다 선거법 위반으로 발언 자체가 위헌이라는 지적이 곧장 제기됐다.

뿐만 아니라 지극히 예민한 사안이었던 민주당 시절의 경선 자금 문제와 관련 자신이 쓴 돈을 “십수억원 규모”라고 밝힌 뒤 “경선자금 문제는 공방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이 말에 민주당이 뒤집어졌다.

조순형 민주당 대표는 다음날 관훈토론에서 “한화갑 전대표는 경선자금으로 구속하려면서 노 대통령이 자신과 정동영 의장의 경선자금에 대해서는 검찰총장처럼 자꾸 검찰에 지침을 주고 있다”며 비난했다.

또 노 대통령의 십수억원 경선자금에 대해 “선거법상 한도를 넘은 것”이라며 “검찰이 끝까지 추적하고 정상적인 사법처리가 안 된다면 탄핵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탄핵정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대통령의 ‘말’이 정치적 파란을 불러일으킨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탄핵을 이끌어낸 취임1주년 때의 ‘혀 놀림’은 가히 압권으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대통령이 내뱉은 ‘말’은 야권을 극도로 흥분시켰고, 곧이어 탄핵정국을 형성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뭔가 다른 점이 있었다. 역대 대통령들이 흔히 써왔던 야권 분열 책동이 아니었다. 야당을 한 데 똘똘 뭉치게 해서 싸잡아 죽이는 전략이었다.

노 대통령은 야권으로 하여금 자신을 공격하도록 만들어 스스로를 힘없이 핍박받는 존재로 부각했다.

‘힘 센 애들이 나처럼 순진한 애를 때려요’라며 국민들에게 일러바치는 모양새다. 그러고 난 뒤, 이를 국민적 선동으로 연결시켰고, 결국 정국을 여대야소로 만들었다.

당시와 매우 유사한 상황이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취임1주년과 집권절반이라는 상징적인 매듭 지점에서 공개적으로 충격적인 발언을 쏟아낸 점이 닮았다. 의도적으로 정치권을 발칵 뒤집어 놓으려고 작정한 것처럼 보이는 점도 똑같다.

또 이 같은 발언 배경이 위기에 봉착했거나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라는 점도 유사하다. 뿐만 아니라 야권을 모이게 해서 대통령을 한 목소리로 공격하도록 유도하는 모습도 1주년 때와 매우 흡사하다.

지난해 2월말 탄핵 이야기가 등장한 이후 야권은 힘을 합해 대통령을 궁지로 몰아 넣었다. 하지만 대통령을 지지하는 세력들의 모임이 형성되면서 다시 한번 대선 때와 유사한 바람이 일었다.

결국 4월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예상 밖의 압승을 하면서 제1당으로 등극했고, 열린우리당이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민주당을 완벽하게 밟았다.

노 대통령은 2002년 민주당 대선 경선 때부터 ‘바람 정치’에 맛을 들였다. 당시 전라도 광주 경선에서 1위로 등극하면서 바람을 일으켰고, 결국 경선 1위에 올랐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 계속 뒤지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나는 늘 열세에 놓여있다’는 이미지가 젊은 층의 표를 계속 모았다. 결국 그는 대통령선거에서도 이겼다.

그는 대통령이 된 후에도 ‘열세 공략’을 계속했다. 실제로도 극심한 여소야대였지만 노 대통령은 스스로를 더 공격당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처지를 힘든 상황으로 조성해서 지지세력을 결집시키는 노하우가 이미 정점에 달해 있는 상태였다. 이 실력이 취임1주년을 전후해서 다시 한번 발휘됐고, 노 대통령이 스스로 조장한 탄핵정국은 총선 대승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집권 반환점이었던 8월 25일, 노 대통령은 다시 한번 정치권을 격정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야권은 한 목소리로 대통령의 연정 발언을 비난했다.

“차라리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하야 촉구의 목소리도 강하게 나오고 있다. 모양새로 보자면 분위기가 사뭇 탄핵정국 때와 비슷한 면도 있다. 하지만 상황은 예전 같지 않다. 진보세력인 민노당의 비난이 보수 야당과 크게 다르지 않다. ‘너나 할 것 없이’ 대통령을 욕하는 중이다.

민노당은 노 대통령의 TV대담이 끝난 직후 논평을 통해 “오늘 프로그램에는 국정최고 책임자인 대통령도, 국민도, 대화도 없었다”며 “한 정치인의 몽니만 있었을 뿐 국민이 고대하던 민생과 개혁의 비전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여권에서조차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아연실색하고 있다는 점. ‘권력을 한나라당에게 통째로 넘겨주겠다’는 대통령의 발언을 더 이상 참기 힘들다는 반응들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열린우리당 탈당 0순위로 거론되고 있는 신중식 의원은 “대통령의 말에 아연실색했다”며 “국민에 대한 무책임한 말이 아닐 수 없다”고 했다. 또 “국민에 대한 책임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며 “당원들에게 좌절감과 분노를 주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다른 한 의원은 “이건 거의 독재에 가깝다”며 “민주적인 당과는 거리가 자꾸 멀어지고 있어서 안타깝다”고 했다.

여권 인사들은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매우 자제하는 분위기지만 개인적인 심경을 묻는 질문엔 대부분 난감해하면서 안타까움을 전했다.

어떤 의원은 “대통령이 하도 말을 많이 하니까 우리는 그냥 말 안하고 가만히 있어야 될 것 같다”며 우회적으로 대통령의 ‘말’을 비난하기도 했다.

여권의 한 인사는 “이렇게 대통령이 한번 크게 휘젓고 나면 당원들은 둘로 쪼개져서 싸우게 되는데 상처가 오래간다”며 “뭔가 의미 있고 실효성이 있는 건설적인 싸움이라면 할 만 하겠지만, 말 같지도 않은 내용을 가지고 분란을 일으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고 말했다.

당원들의 격한 불만도 봇물 터지듯 하고 있다. 당원게시판에는 ▲ “이 꼴 보려고 촛불을 들고 소리지르고 헤매고 다녔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 “국가 리더로서 자질이 형편없이 부족하다” ▲ “못난 대통령을 뽑은 나 자신을 원망한다” ▲ “그럴 거면 왜 대통령 했나, 화낼 힘도 없다” ▲ “에라이 못난 분 자질이 없으면 나서지나 말지” 등 ‘대통령 잘 못 뽑았다’는 투의 글이 수두룩하다.

이렇듯 내부에서조차 대통령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있는 지경이다. 이 때문에 이번만큼은 노 대통령의 ‘충격 발언’이 지난 총선 전 때처럼 제대로 먹혀들지는 않을 것으로 정치권은 내다보고 있다.

TV대담 직후의 흥분된 시간이 지나면서 정치권에서는 “대통령의 이 같은 ‘정치 쇼’도 결국은 선거를 겨냥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기 시작했다. 늘 그랬듯이 노 대통령이 이번에도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반전을 꾀하기 위해 포석을 깔고 있다는 분석이다. 바로 지방선거를 겨냥하고 있다는 것이다.

10개월이란 시간이 남아있지만, 오는 10월 재보선이라는 중대한 고비가 있다. 지난 4월 재보선에서의 참패가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을 20%대까지 떨어뜨린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는 점을 노 대통령으로서는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열린우리당의 한 당직자는 “오는 10월 재보선에서 또다시 실패한다면 내년 지방선거는 볼 것도 없이 끝장”이라며 “그만큼 여권에서는 이번 10월 재보선에 사활을 걸어야할 운명이다”고 말했다.

특히 노 대통령의 최고 숙원 가운데 하나인 지방균형발전 프로그램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선 지방선거에서의 승리는 반드시 쟁취해야 할 목표다.

지역감정해소와 지방균형발전을 추후 자신의 최대 행적으로 삼고 싶어하는 노 대통령으로서는 자치단체의 적극적인 협조가 무엇보다 절실하다. 추후 레임덕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어떤 식으로든 지방선거에 사활을 걸어야 할 처지다.

대부분의 정치전문가들은 내년 지방선거를 계기로 노무현 정권은 전에 없던 급격한 레임덕을 맞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노무현 정권 2년 반은 자타가 공인하는 실패의 시간이었다. 여권 관계자에 따르면, 최근 들면서 노 대통령은 ‘나는 취임 초부터 레임덕이었다’는 말을 부쩍 많이 했다. 국민들이 자신을 지지하지 않고 있다는 데 대한 불만 표시다.

노 대통령으로서는 당연히 서운할만한 일이다. 투표자 절반 가량의 지지로 대통령의 당선됐지만 취임 직후 여느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90% 이상의 지지를 받았다.

이후 1년 만에 지지율은 20%대로 떨어졌다. 그리고 탄핵 정국이 됐고, 총선을 치렀다. 탄핵으로부터 벗어난 뒤 대통령으로 복귀했을 때 지지율은 50%대로 치솟았다. 하지만 다시 1년이 지난 후 20%대로 또 떨어졌다.

지금껏 보여온 노 대통령의 행적을 감안하면 노 대통령은 향후의 선거를 위해 이미 포석을 깔기 시작했고, 지지세력의 집결을 위해 대연정을 계속 외칠 것으로 전망된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민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