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창희 교수
[박창희 건강칼럼] 혹자는 우스갯 소리로 이런 말을 했다. 밀가루로 만들면 칼국수요, 밀가리로 만들면 칼국시라고. 밀가루던, 밀가리던 밀가루는 탄수화물의 주범으로 우리의 뱃살을 풍요롭게 만들고 있음은 분명하다. 다이어트의 적으로 치부되고 있지만 밀가루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닐꺼다. 밀가루를 취하며 굶주림을 극복해온 인간들이 이제는 자신을 홀대하려 하니 말이다. 그러나 밀가루의 잘못이 아니다. 생산성 향상을 통한 이익 증대의 욕심에 인간의 눈이 멀면서 밀 본연의 가치가 희생된 것이다. 현재 우리가 먹는 밀가루는 야생 들판에서 자라나 인간의 손으로 수확한 밀이 아니다. 각종 질병이나 가뭄과 높은 기온을 견뎌가며 생산성을 높일수 있도록 인간이 변형시킨 상품에 불과하다.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자생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의도한 대로 순종하며 변해온 돌연변이 교잡종 밀인 것이다.

가을 들녘의 코스모스 꽃이 한들 거릴수 있는 이유를 우리는 잘안다. 늘씬한 키 덕분에 가볍게 흔들려 넘실댈수 있다. 밀밭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람에 우아하게 흔들리는 키 큰 밀밭 풍경이라는 낭만적인 이미지를 우리는 기억한다. 그러나 이제 밀밭은 더 이상 코스모스처럼 춤을 추거나 누런 파도처럼 물결치지 않는다. 소출이 많은 밀을 거두기 위해 기존의 유전자를 파괴하여 30~60cm 단신의 왜소종 밀을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흔들리지 않으니 낟알을 잔뜩 머리에 이고 있어도 쉽게 넘어지지 않는다. 넘어지지 않는 몸이 되었으니 질소비료를 양껏 빨아들여 풀의 윗부분이 거대한 비율로 성장할수 있었다. 만삭의 몸으로도 허리가 구부러지지 않는 밀이 한껏 수고하여 인류의 배고픔을 해결했다손 치자. 문제는 수많은 변형을 거친 이상한 식량이 인간의 몸에 적합한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아무도 하지 않았다는 거다. 이 부분에서 필자가 분명히 밝히고 싶은게 있다. 필자는 잡종 교배등의 기술로 수천가지의 밀을 개발한 유전학자들이나 또 그것을 생산해낸 많은 농부들을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농업이라는 것이 제한된 토지를 가지고 효율성과 단위 면적당 생산성을 늘려 사람들을 굶주림으로부터 구해 냈다면 그들은 최선을 다해 노력하여 세계의 기아감소라는 칭송받을 만한 목표를 달성했을 뿐이다. 문제는 지금도 식탁에 앉아 인위적으로 급조, 양산된 밀가루를 삼키고 있을 수많은 사람들의 몸에 미칠 변형밀의 영향이다.

지금 우리가 먹는 밀은 인류가 장시간 먹어온 밀과는 확연히 다른, 즉 탈곡도 쉽고 반죽이나 성형이 잘되도록 유도하여 만들어낸 공산품이기 때문이다. 교잡한 관계에 의하여 탄생한 식품이 인간이나 인간의 몸에 미칠 영향에 대한 그 어떤 실험이나 연구도 진행되지 않았다. 정략적 관계에 의하여 억지로 맺어진 남,녀의 사랑이 파탄지경에 쉽게 이르듯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된 밀도 문제가 있을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과연 밀가루의 어떤 점이 문제일까. 일단 밀가루는 외견상 아주 희고 고운 자태를 뽐낸다. 자연 상태의 단단한 통곡을 그대로 빻아냈다면 저토록 희고 고운 백분상태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표백제를 퍼부어 버무린 것이라는 극단적 논리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표백제를 쏟아붓고 버무려서 몇 만톤의 밀가루를 희게 만든다는 생각은 차라리 코미디에 가깝다. 올바른 비판은 정확한 진실을 기반으로 해야 설득력을 얻을수 있다. 껍질과 배아를 없애고 색깔이 흰색인 낱알 부분만을 쓰기 때문이며 공기접촉과 빛 반사율도 밀가루를 희게 보이도록 거든다. 특히 밀가루는 생산라인에서도 파이프를 통해 공기압으로 이동할 정도로 입자가 곱고 미세하다. 게다가 친수성이라 약간의 물을 붓고 치대면 아주 특이한 점성의 물질로 변한다. 만두피를 빚는 엄마 옆에서 반죽을 조금 얻어 장난을 쳐본 경험도 있지 않는가. 그런데 밀가루가 뭐 어떻다고? 서두르지 말자. 다음호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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